#2. 존의 한국행을 기다리며
휴대폰을 열어 달력을 확인한다. 10월 10일..! 벌써 열흘이나 지났다니 믿기지 않는다.
시간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흐르고 있다. 정확히 내가 이번에 한국에 머무는 시간은 한달 하고 일주일. 아일랜드에서 한국행 티켓을 살 때는 '한달 정도면 넉넉한 휴가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남아돌지도 모를 시간을 위해 영어교재와 스페인어 소설까지 챙겨넣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그동안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일들과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쏟어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분명 꼭 만나고 싶었는데 못만나고 가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 올 때마다 한달 넘게 머물렀지만 떠날 때면 늘 못 만난 사람, 못한 일, 못간 곳들이 아쉬움으로 남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공부하려고 가져온 책들은 올 때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다시 캐리어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도 한국에 올 때면 늘 똑같은 실수를 한다.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한달 동안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과 기대로 가득 찬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부지런히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만날 약속을 잡고, 가족여행 계획을 세우고, 치과진료나 건강검진, 머리 염색과 펌 등등 아일랜드에서는 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개인 잡무를 보기 위한 스케줄을 짠다. 이제는 골동품이 된 내 017 휴대폰이 바쁘게 울리고 나는 이런저런 만남과 모임을 하루에 두세 탕씩 뛰며,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나는 매우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신하는 거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영락없이 감기. 시차도 채 극복하기 전에 너무 무리를 한 탓이다.
한국방문 열흘차. 무슨 코스인 양 변함없이 감기가 찾아왔다. 엄마의 이른 귀가 명령. 게다가 일주일 후면 존도 한국에 온다. 남편과 함께 보낼 시간을 위해서라도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일찌감치 집에 와 조용한 방안에서 컴퓨터를 열고 옛날에 쓴 글들을 뒤적여 본다. 파일을 만들어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잘 못하는 탓에 내 글들은 가상의 공간 이곳저곳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그러다 발견한 이것. 우리의 원거리 연애시절, 존이 나를 보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던 2012년 5월의 흔적.
더블린에서 아부다비를 거쳐 인천공항으로...15시간의 긴 비행 끝에 존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하는 시간 11시 45분. 아침에 집 청소하고, 샤워하고...(꽃단장 제외)등등 나름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늦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2번째 타보는 공항철도 덕을 톡톡히 봤다. 홍대입구역에서 공항철도로 인천공항까지, 3700원이란 착한 가격에 50분 만에 도착! 시계를 보니 11시 부근이다.
그가 나오는 입국게이트 D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야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에 시원한 과일주스 한잔으로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남는 시간 동안 합정 가는 리무진버스 정거장과 배차시간도 한번 확인하고, 공항 안에 있는 SK텔레콤랑 LG-U 가서 렌탈폰서비스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착시간쯤 되어서 다시 D게이트로 갔더니, 비행기가 연착이란다. 11시 59분 도착 예정. 게이트 앞 벤치에 앉아 가져간 책을 꺼내 읽으며 기다리려 했지만, 마음이 들떠서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달반 만의 해후. 어찌 보면 그리 긴 헤어짐도 아닌데, 내겐 마치 1년반 같은 시간이었다.
50분이 넘어갈 때쯤 전광판이 다시 연착을 알려왔다. 12시 22분 도착. 으...비행기가 계속 연착되는 것만큼 사람 지치게 하는 것도 없다. 책을 그냥 덮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수많은 중국 단체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수트를 차려 입은 외국인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을 향해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엄마, 여기 있어!"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본 청년이 수줍고 환한 미소로 가족들과 상봉하고, 누군가는 국가대표 선수를 맞이하듯 화환은 건네며 기념사진을 박았다. 모두 다른 사연, 다른 모습으로 바다 건너편에서 날아와 한국이란 땅에 발을 딛었다. 그를 생각한다. 나를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사람. 그가 밟는 한국 땅은 그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깜박깜박. 전광판에 그의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사인이 떴다. 이민국을 통과하고 수화물을 찾아 나오기까지 보통 30분은 족히 걸린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자동문이 드르륵하고 열릴 때마다 흘러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그를 놓칠까 싶어 눈이 바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문이 열렸을 때, 저 끝에서 입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포르투갈에서 입었던 파란 자켓. 문이 닫혔다 다시 열렸을 때, 그가 밖으로 나오며 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내가 양팔을 크게 저으며 그를 부르자, 그가 날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난 그 웃음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진한 포옹과 키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오후가 되니 고맙게도 해가 쨍쨍히 빛났다. 커피 두잔을 사들고 공항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 거의 매일 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누었지만, 얼굴을 보니 할 얘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하고 싶은 얘기가 아직 많았지만 우리에겐 한달이란 시간이 있으니, 서둘지 말자. 일단 3일밤을 못 잤다는 그의 휴식을 위해 집으로 향했다.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존과 밖으로 나와 해질녘 홍대 거리를 산책했다. 2주간 금주하고 와서, 시원한 맥주가 미치도록 마시고 싶다기에 어느 테라스가 있는 카페를 찾아 첫 번째 맥주잔을 비웠다. 한국맥주 마셔보고 싶다고 해서 카스 생맥주를 시켰는데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둘다 점심을 걸려 배가 많이 고팠지만, 마음이 너무 들뜨니 밥보다 술이 먼저 땡긴다. 그래서 저녁 먹으러 가기 전 한잔만 더 하기로 하고, 다른 카페로 들어가 이번엔 카프리로 시음! 술 잘 못 먹는 나는 이미 알딸딸해서 밥 생각이 사라졌는데, 그는 막 배가 심하게 고프기 시작한 눈치였다. 한국 온 첫날, 첫 번째 식사를 뭘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생각해 보니 홍대에서 몇 안되는 심플한 밥집 중 하나가 생각났다. 보리밥이랑 수제비 전문으로 하는 <보리울>. 먹어본 적은 없지만 늘 사람이 붐비는 나름 인기 있는 밥집 중 하나다. 그 집에 마지막 손님으로 들어가 보리밥 두 개를 시켰다. 소주도 먹어보고 싶다기에 한병 시켰다. 내가 알려준 대로 각종 야채 넣고 고추장이랑 참기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품이 제법이다. 된장찌개에 맛내기로 들어가 있는 풋고추까지 모조리 떠먹으며 'so hot!' 하면서도 맛있다며 한 그릇을 깨끗이 비볐다. 처음 먹어보는 열무김치에도 두 손가락을 든다. (하지만 결국 소주는 한잔씩 따라 놓고 다 비우지도 못했다.ㅋㅋ) 어쨌든 한국음식 처음 먹어보는 외국인의 저녁식사로 성공적인 선택이었던 듯.ㅎㅎ
어렵게 아빠 다리로 앉아 있던 그가(전통 한국식으로 앉아 먹는 식당이었다) 일어나다 말고 다리가 저려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우스워 한참을 큭큭거렸다. 우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밤 9시가 넘은 홍대거리는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빛을 더해가는 네온사인과 젊은 사람들의 무리가 큰 길부터 골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홍대 주차장길을 가로질러 홍대정문 쪽으로, 거기서 다시 신촌방향으로...중간에 있는 라이브 바에게 한 시간쯤 맥주를 홀짝이며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고 나와, 다시 수많은 네온사인과 거리 식당들, 밤의 소리들을 헤치며 집을 향해 걸었다. 젊은이들로 꽉 메워진 거리, 트렌디한 카페와 레스토랑들...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너 나한테 이 정도라고는 말 안해 줬잖아. 와 이 동네 완전 재밌는데? 왕 트렌디하잖아!"
그런가? 난 홍대 근처가 요즘 제일 '핫'한 장소라고 말해줬던 기억이 나는데, 아마 그는 이 정도로 끓어오르는 분위기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나 보다. 한국이 아무리 빨리 변하고 있어도 유럽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여전히 '아시아'적인 무언가, 즉 조금은 느리고 고풍스런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여튼 분위기에 완전히 취해 버린 그는 피곤함에 다 풀린 눈을 하고서도 그냥 집에 가기 싫다며 맥주 한잔을 더 하고 싶다고 했다. 아니, 사실 그는 느끼한 무언가가 좀 땡겼던 모양이다.(담백한 보리밥으로 끝내기엔 좀 심심했던 모양) 그래서 우리는 한 맥주집 2층 테라스에 앉아 동네를 내려다 보며 얇고 바삭바삭한 피자를 나누어 먹었다. 짭조름한 피자 한입에 맥주 한모금을 삼키고 나서 나가 말했다.
"이거 꿈 같애. 오늘 있었던 일 모두...현실 맞니? 나 기분이 너무 이상해. 구름 위를 떠나니고 있는 것 같아."
곁눈질로 어린아이 같은 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나도 그래. 온종일 그랬어. 아니 며칠 전부터 영 현실감각이 없더라. 네가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다는 게, 우리가 아일랜드가 아닌 한국에서 지금 이렇게 함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중요한 건 있지? 너무 행복하다는 거야. 현실이 아니어도 좋아. 지금 무지 행복하니까.
...
서울에서 처음 맞는 밤이 그렇게 꿈 같은 채로, 홍대 거리 위에 걸려 있었다.
이 글을 읽고 나니 문득 그와 나의 인연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진짜로 부부가 되었다는 것. 내가 두 개의 나라를 고향으로 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 후면 우리가 함께 다시 홍대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맥주잔을 부딪칠 수 있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