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나는 너에게 속했다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말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난 한국으로 '떠났었던' 거다.
긴 비행 끝, 피곤하고 지친 나를 맞아준 것은 어김없이 아일랜드의 비와 바람, 그리고 존. 젊은 시절 아빠가 즐겨 입으시던 골프점퍼를 입고 입국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가,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그의 품에 안기자마자 또 바보처럼 눈물이 났다. 엄마와 헤어지며 쓸쓸함에 고였던 눈물이 그리웠던 그를 만난 반가움과 겹쳐 정체 모를 감정이 되어 흘렀다.
존은 나보다 일주일 먼저 아일랜드로 돌아와 있었다.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 일정 때문이었다. 물론 내 일정을 당겨 함께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부러 그렇게 한 이유는 한국을 떠나기 전 엄마와 단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고, 조용히 이번 한국 방문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먼저 떠나야 해서 많이 아쉬워했던 존도 돌아가자마자 지원했던 직장에 추가 서류를 제출하느라 정신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아주 적절한 결정이었던 셈이다.
'끝'은 늘 새로운 '시작'과 함께 찾아온다. 나에게 한국을 오고 가는 모든 시간은 늘 또 하나의 끝이고, 시작이다. 인천공항까지 배웅해준 엄마와 헤어지고 홀로 남은 토요일 밤의 공항은 유난히 쓸쓸했다. 아마도 전날 밤부터 후둑이던 빗방울과 낙엽 쌓인 거리를 이리저리 휘젓는 바람에 수선스러워진 마음에 이별이 더해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난 일주일처럼 지나가 버린 한달의 시간을 기억했다. 이번 한국방문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존과 함께 보낸 열흘밤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를 후히 환영해주고 대접해주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고 술잔을 부딪치고 두 번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아빠가 잠들어 계신 묘지를 가족들과 함께 찾아 작은 소나무 곁에 소주를 부어 드렸고, 존은 부모님댁에 머무는 내내 결혼할 당시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받았다. 조조영화를 함께 보고, 서울의 이곳저곳을 걸으며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현실의 곤한 삶을 아일랜드에 잠시 내려놓고 우리는 그렇게 온전한 휴가를 즐겼다.
마침 내가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라 우리는 인터넷으로 위클로 산자락에 있는 한 호텔을 예약해 놓은 참이었다. 존의 희망사항 대로 수영장과 스파도 있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서 비 내리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느긋한 일요일 오후를 즐기기에 안성마춤일 듯했다. 일단 집에 가서 한국에서 공수해온 김치와 얼린 떡, 찐고구마 등 먹을 거리를 꺼내 냉장고에 넣어두고, 작은 베낭 하나에 간단한 세면도구만 챙겨가지고 우리는 다시 비 오는 거리로 차를 몰았다.
나는 아일랜드의 비 오는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열심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익숙했던 그것들이 한달 사이의 공백만큼 새롭게 보였다. 흐린 하늘 아래 키가 낮은 조지안 하우스들이 수채화 속 풍경처럼 맑고 서늘했다. 존과 나는 우리가 즐겨가던 그레이스톤의 채식식당 <해피페어>에 들러 인디언 향신료로 맛을 낸 고구마스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점심으로 먹고는 호텔로 향했다.
글랜뷰 호텔은 사진에서 본 것처럼 위클로의 아름다운 산새를 품고 있었다. 비만 거세게 오지 않았다면 한동안 산책로를 따라 산속을 거닐어도 좋았을 터였다. 하지만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점심을 배부르게 먹고 나자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한시라도 빨리 호텔방의 깨끗한 침대시트 위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도 닦지 않고 신발만 벗어 던진 채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수영하러 안 갈래?" "나도 갈 거야. 잠시만...잠시만 이렇게 잠시만 누워 있다가 같이 가자..." 분명 내 말을 듣고 존이 나를 따라 침대 속으로 들어왔는데, 눈을 떠보니 캄캄한 방안이었다. "깼어?" 눈을 떠 보니 존이 샤워코롱 냄새를 풍기며 침대 맡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수영장에 갔다 온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했나봐.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깨우지를 못하겠더라."
방에 불을 켜니 창밖이 깜깜했다. 몇 시간을 도둑 맞은 기분에 마음이 허해져서 괜히 존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래도 깨웠어야지.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 치사하게 혼자만 가고..!" 하지만 깨웠어도 가지 못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자다가 깨서 배가 하나도 안고팠지만 이미 호텔 레스토랑에 자리를 예약해 둔 터라, 부시시한 채로 바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호텔방으로 돌아온 나는 9시도 되기 전에 다시 골아 떨어졌다. 그리고 꿈속에서 나는 원 없이 수영을 했다. 캐리비안해가 아니었을까 싶은, 따뜻하고 맑은 바다속에서.
하룻밤이 지난 오늘, 나는 특별한 일정 없이 더블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늘 거닐던 거리들도 한번씩 걷고, 평소 잘 가던 밥집에 가서 오랜만에 향긋한 허브향이 나는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을 먹고 싶기도 했다. 더블린은 안녕했다. 스프도 여전히 맛있었다. 내 몸과 마음에 기억되어 있던 이곳에서의 일상이 다시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 이제 나는 네게 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