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새해 첫날, 더블린 시티에서
한국보다 9시간 늦게 새해가 밝았다. 한국에서 존과 함께 보낸 2013년을 빼면, 아일랜드에서 4번째 맞는 새해 첫날. 하지만 생각과 감정이 한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 모두에 속해 있는 나는 마음으로 두 번의 새해맞이를 했다. 31일 저녁에는 한국의 시계를 따라 2015년의 줄어드는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2015년 중 한국에 속했던 시간과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한국의 가족들과 함께 '해피 뉴이어'를 외쳤고, 그때부터 9시간 남은 아일랜드의 시계를 따라 움직였다. 존과 함께 소박한 저녁식탁을 꾸려 그가 만든 멀드와인과 함께 나눈 후, 거실 소파에 함께 누워 텔레비전에서 하는 시시한 영화를 함께 보았다. 그러다 와인의 취기에 잠이 쏟아져 번갈아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2주째 쏟아지는 폭우가 어느 정도 잦아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하늘색은 시커맸고, 강한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미친년 머리처럼 휘젖어 놓으며 '윙윙' 무섭도록 울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시내와 브레이 씨프런트에는 여느 해처럼 새해를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가 준비되고 있을 것이었다.
오코널 스트릿에는 대형 무대가 설치되고 뮤지션들이 그 위에 올라 자정을 맞도록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은 고어택스 자켓 지퍼를 턱까지 끌어올려 비바람을 피하며 2015년의 마지막과 2016년 첫 시작을 자축할 것이다. 또 여전히 많은 이들은 하이힐에 민소매 드레스, 수트를 빼입고 빗속으로 차를 몰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잔을 부딪히며 '해피 뉴이어!를 외치겠지. 그리고 12시 정각이 되면 그 순간을 기다려온 폭죽들이 가미가제 특공대처럼 하늘로 솟아올라 흐린 하늘을 잠시나마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이고 장렬하게 산화하리라.
하지만 폭우를 동반한 지난 4일간의 West Cork 여행을 여렵사리 마치고 집에 돌아온 우리에게 가장 간절했던 건 따듯한 난로와 담요, 그리고 휴식이었다. 그렇게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우리는 새해가 되기 20분 전 겨우 쏟아지는 잠을 겨우 털어내고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아이리쉬 뉴스 채널인 RTE1를 보며 카운트 다운을 기다리고 있었던 우리는, 새해가 8분이 지났을 때야 카운트다운을 놓쳤다는 걸 알고 말았다. RTE1에서 홍수피해 뉴스만 내보내고 있었던 탓이다. 그와 나는 서둘러 8분 늦은 새해 건배와 새해 키스를 나누었다.
다행히 영국 방송인 스카이뉴스에서 폭죽으로 수놓인 런던 타임스퀘어의 하늘을 엿볼 수 있었다. 20인치 좁다랗고 낡은 화면으로 보는데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화려하고 멋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비바람 부는 발코니로 나가 브레이 씨프런트에서 터지고 있던 몇몇 불꽃의 마지막 숨을 바라보았다.
아이폰 첫화면의 달력 아이콘에 떠 있는 '1.1'이라는 숫자가 왠지 낯설다. 하지만 참 날렵하고 예쁘구나, 생각한다. 아침이 되고 오후가 되었지만, 하늘빛은 어제 저녁과 비슷하다. 거리의 가로등이라도 꺼져 버리면 암흑에 갇힐 듯 흐리고 무거운 하늘...
한국에 있을 때 나에게 1월 1일은 1년 중 가장 떠들썩한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신정연휴가 줄어들고 구정연휴가 늘어나자 신정에 세배를 하고 성묘를 가던 가족들도 신정 대신 구정에 모이는 게 일반화되면서, 우리 가족은 신정 가족모임을 고수하는 거의 유일한 가정이 되었다. 12월 31일 밤에는 늘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새해를 맞았다. 새벽 1시쯤 예배가 끝나고 밖을 나서면 늘 매서운 겨울바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배당 뜰에서 만난 친구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느라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새해 아침은 엄마가 끓여주신 떡국으로 시작되었다. 아침을 먹은 후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후엔 또 가까운 친척들께 인사를 드리고 저녁 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온 가족이 함께 만두를 빚어 만두국으로 저녁을 먹었다. 간혹 친척집에 세배 드리러 가는 해도 있었는데 그런 오후에는 시내에 나가 혼자 영화를 보거나 친구와 커피벙개를 하곤 했다.
아일랜드의 새해 첫날은 한국에서 내가 보내던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크리스마스로 정점을 치고 난 이후로는 어디를 가나 조용하다. 그나마 12월 26일에 시작된 대규모 세일 덕분에 쇼핑거리에 사람들이 좀 모여드는 정도랄까. 1월 1일은 크리스마스날처럼 많은 상점, 레스토랑, 영화관이 문을 닫는다. 한국처럼 새해 결심과 계획으로 페북 화면이 도배되지도 않고 갑자기 헬스클럽이 새로 등록한 사람들로 북적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갑자기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했던 새해 첫날의 북적거림이, 보드랍고 쫄깃한 떡국떡이 그리워진다. 더욱이 존이 출근까지 한 2016년 첫날, 나는 혼자 기차를 타고 더블린에 왔다. 존과 함께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혼자 비오는 더블린의 새해 첫날을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비는 멈추지 않고 내리지만, 오히려 점점 더 2016년에 대한 기대와 다짐들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다. 아일랜드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무엇을 하려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날씨와 싸울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그냥 언제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고. 정말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준비가 된 것 같다. 비바람과 상관 없이, 아니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