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도 다시 한번

다사다난했던 Trim Trip 보고서

by Maya Lee

새해 희망으로 가득찬 새해 첫글을 남긴지 얼마 안돼, 뜻밖의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마치 '비바람과 더불어 행복할 거'란 다짐을 비웃듯 비바람은 나날이 더 심하게 몰아쳤고 아일랜드 전역이 물난리로 몸살을 알았다. 물에 잠긴 집과 차를 버려두고 탈출하는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얼굴과 참혹하게 무너진 다리와 건물들의 모습이 매일 신문1면을 도배했다. 하루종일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회색 하늘이 무겁게 매달려 있었고, 본격적인 윈터블루스를 알리는 '우울'의 공기가 거리를 배회하며 사람들의 입꼬리마저 처지게 만들고 있었다.

존과 나는 '이 우울한 분위기를 탈출해 보자'며 1박2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더블린에서 차로 4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트림(Trim)'은 존을 만나기 전 혼자 여행왔다가 사랑하게 된 작은 타운이다.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타운으로 뽑혔을 만큼, 다른 아이리쉬타운과 달리 길거리에 휴지를 찾아보기 힘들고 거리 구획도 아기자기하면서 정갈하다. 하지만 트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트림 캐슬(Trim Castle)'이다. 아일랜드에 남아 있는 로만고딕 양식의 성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는 이 성은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꽤 큰 편인데다, 성 곁을 흐르는 작은 강과 여러 갈래 산책길로 이어지는 주변 경관도 그림처럼 아름답다. 작은 시골마을로서 이런 엄청난 보물을 소유하고 있다니, 특별한 축복을 받은 타운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렇게 아름다운 성이 바라보이는 호텔방에서 묶게 된 우리도 더없이 행복해야 하는 게 맞는 거였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타운센터의 한 중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떄까지만 해도 기분도 좋고 사이도 좋았던 우리는 호텔에 돌아와서 작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건 분명 침대 옆 스탠드만 켜고 다른 불을 모두 끄자는 그와, 아직 저녁8시밖에 안됐고 탁자에서 공부를 좀 하다 자고 싶으니 큰등을 좀더 켜놓겠다는 나의 의견 차이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처음 다투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주제로 다투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불씨가 되었던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영역으로 번져나가는데, 그중에 오래전 이미 싸웠고 이후 해결했다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다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불씨가 사정없이 커진다. 어느 순간, 예상치 않게 튀어나온 서로의 언어로 인해 감정이 한번 크게 상하고 나면 그날밤은 답이 없다.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고 마음은 심각해진다. 보나마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밤새 뒤척일 테니 이미 잠은 다 잔 셈이다.
다투고 난 부부에겐 더블베드만큼 어색한 공간도 없다. 소파나 다른 방 침대 등의 벗어날 공간이 없는 호텔방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저 그 어색한 침묵을 짊어지고 등을 마주한 불편한 자세로 날이 밝기만 기다릴 수밖에.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작은 다툼이라도 하고 나면 잠을 잘 못잔다. 씩씩대다가도 머리만 대면 코를 골며 잠드는 남편이 얄미워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밤 사이 수만 개의 생각이 오가는데, 물론 대표주자는 그가 던진 말 중 크게 상처가 된 것들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더욱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판다. 참으려 해도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흘러 베게닛을 적시고 있다. 그러면 다음 생각나는 단어가 '이혼'이다. 사실 '내가 이 사람과 계속 같이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지금의 상황이 상상을 통해 점점 더 안좋은 방향으로 확대된다.
설상가상으로 새벽 서너시쯤 천정에서 성가신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여보니 누가 물건을 내던지는지 쿵쿵 바닥을 치는 둔탁한 소리와 잔뜩 독이 오른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여자의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윗층 어느 방에선가 심각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호텔 프런트에 알려야겠다 맘 먹고 있는데, 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직원이 올라가서 중재를 했는지 다행히 잠시 후 끔찍했던 소음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존과 나는 더 이상 잠이 들지 못하고 번갈아 몸을 뒤챘다. 그 충돌과 분노와 절망의 소리들이 남기고 간 공포와 슬픔이 내내 마음속을 떠돌았다.
저들은 왜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을까? 저들도 분명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려고 이 호텔까지 함께 왔을 텐데, 뜻밖의 악몽으로 변한 이 여행을 어떻게 극복해 낼까? 아니면 이 밤이 저 둘 사이의 마지막이 될까?..


뜬 눈으로 지새고 맞은 아침만큼 황량한 것이 또 있을까? 새해 희망이고 나발이고 다 사라지고 텅 빈 마음과 피곤한 몸뚱어리만 덩그마니 남아버린 그런 아침. 사실 전날 일어난 말다툼은 아주 짧고 조용했는데, 그 결과로 남아버린 거리감은 왜 그렇게 끝 모르게 막막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아침 6시반. 일어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어차피 잠은 다 잤고, 무엇보다 일찌감치 찾아온 공복감 때문에 속이 쓰렸다. 일어나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고 존의 휴대폰에 '호텔 레스토랑에 있겠다'는 메시지를 남긴 후 먼저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혼자 커피를 홀짝이고 크루아상을 뜯는데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가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존과 함께하는 아침식사를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1시간쯤 지나 존이 나타났다. 그도 잠을 제대로 못잤는지 피곤한 얼굴이다. 그는 입맛이 없다며 작은 접시에 과일과 요거트만 담아 왔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만 간간히 주고 받을 뿐 여전히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의 공간을 배회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간밤에 윗층에서 싸우는 소리 들었지? 나 어려서 술 취한 삼촌이 소리지르며 화낼 때 공포 속에서 떨던 생각이 나서 너무 괴로웠어..."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싸우는 거 정말 싫어. 이런 어색한 거리감도 너무 싫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자. 우린 극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계속 함께 가는 거지?"
해결점이 안 보이니 그와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해결책은 늘 있다, 단지 지금 안 보일 뿐. 그에게서 멀어지는 방법으로 문제를 피하는 건, 회피지 극복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린 부부니까, 함께 해결해야 한다. 그의 눈을 바라봤다. 전날 내내 피해다녔던 그의 눈동자가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우린 그렇게 오래도록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둘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묵은 감정들이 씻겨 내리도록 그냥 두었다.
우리는 호텔방으로 돌아와서 말없이 짐을 꾸렸다. 이제 브레이의 우리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웃음이 났다. 나도 웃고 그도 웃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낄낄거리기도 했다. 언제 그토록 그가 미웠던가 싶게, 그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우리가 다시 행복해진 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다른 생각 때문에 힘든 것보다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부딪칠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전날 전쟁처럼 싸웠던 그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화해하고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까...? 2016년 새해 우리 부부는 이렇게 삐걱대고 실수하면서 조금씩 더 성숙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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