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리어리의 한 카페에서 발견한 것
던리어리의 한 카페에 앉아 탁자 모서리에 걸린 햇살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살을 에는 듯한 입김까지 불어대던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구름을 모두 걷어내고 말갛게 씻긴 얼굴을 내밀었다. 거의 기억에서 잊혀졌던 파란 하늘,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태양의 열기...내가 지금 1월의 아일랜드에 있는 게 맞는 걸까? 창밖에 걸린 나뭇가지의 반짝임도, 커피숍 안을 흐르는 따뜻한 공기도,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 꿈결 같은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둘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계속 카메라 셔텨를 눌러댔다. 오늘 아침부터 왠지 모르게 길을 잃은 듯 공허하고 쓸쓸했던 내 마음을 위로하는 신의 손길. 내가 함께 있지 않냐고, 내가 도와줄 테니 힘을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마침 창밖을 구경하기 좋은 2층 창가자리였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어린 학생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따라, 대머리 아저씨의 매끈한 머리통 위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갈색머리 여자의 기다란 다리의 움직임을 따라, 햇빛이 눈부시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어린시절의 일상 한때가 그토록 간절히 그리워진 것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 숙제를 끝내고 나면 난 늘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장 볼 거 없어요?" 장보기 심부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 그걸 알았던 엄마는 늘 살거리를 만들어주셨다. 특별히 살 것이 없는 날은 가장 기본 식재료인 '두부와 콩나물'이 단골 목록이었다. 그럼 난 자전거를 타고 동네 슈퍼마켓까지 신나게 달렸다. 똑같이 생긴 두부와 콩나물인데도 난 게 중 모가 부서진 곳 없이 반듯한 두부와, 썩은 녀석 없이 노랗게 잘 익은 콩나물을 골라 자전거 바구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장보러 가는 길이 10살 여자아이에게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기억나는 건 살짝 기운 저녁햇살을 지고 바람을 맞으며 오갔던 혼자만의 짧은 산책길이 가슴 벅차게 자유롭고 즐거웠다는 것...
난 왜 아일랜드의 작은 타운에 갑자기 찾아온 햇살 속에서 그 기억을 찾아낸 걸까. 생각해 보니 새해를 맞아 새로운 목표와 계획을 세우고 희망하며 기도하는 마음 한편에, 지난 해 이루지 못한 꿈, 아직 정하지 못한 진로에 대한 부담감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브런치를 통해 나보다 먼저 출판의 꿈을 이룬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상대적인 절망감이 있었고, 점점 더 홍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매체의 수많은 글들 사이에서 과연 내가 쓰는 글이 특별할 수 있을지, 세상에 공개하는 의미가 있을지 회의감도 들었다. 그래서 순전한 자유를 느꼈던 어린시절의 한순간이 갑자기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부담감을 내려놓아야겠다. 그저 10살 소녀의 한없이 자유롭고 즐거웠던 산책길처럼, 글쓰기란 길을 걷고 싶다.
붙잡아두고 싶었던 햇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다시 하늘이 시커멓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 스웨터 위에 햇살 한줌이 남기고 간 온기는 오래도록 따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