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남는 건 마음이겠지
던리어리에서 더블린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몽스타운(Monkstown)'이라는 이름의 작은 타운이 나오는데, 던리어리 바로 옆 동네인데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던리어리에는 어학원과 컬리지, 영화관 등이 있어 외국인 거주인구가 많고 무엇보다 항구를 끼고 있어 주말이면 관광객이 꽤 붐비는 데 비해, 몽스타운은 카페, 레스토랑 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고 거리에서 만나는 동네주민도 대부분 아이리쉬 가족이다. 아이리쉬 중산층이 모여사는 동네라, 규모는 작아도 제법 특색 있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아 가끔 일부러 찾게 되는 곳이다.
다행히 요즘은 3일에 한번쯤 비가 멈추고 해가 난다. 추위도 작년보다 잦아든 느낌이다. 아일랜드에 살다 보면 흐리고 비오는 날과 햇빛이 비추는 날,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얼굴 표정뿐 아니라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도.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도시 전체가 햇살을 즐기는 날. 바람이 없어선지 기온마저 봄날씨처럼 포근했다. 던리어리에서 요가를 하며 태양에너지를 흠뻑 빨아들인 후, 가벼워진 기분으로 몽스타운까지 천천히 산책했다.
금요일 12시의 몽스타운은 활기에 넘쳤다. 카페나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마다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침을 절대 거르지 않는 나로서는 브런치가 아닌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 날씨 때문인지 오랜만에 따끈한 스프 대신 신선하고 상큼한 샐러드가 당겼다. 아보카 레스토랑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격이 비싸서 망설이던 차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레스토랑 옆 델리코너에서 샐러드를 테이크아웃해서 바깥 벤치에 앉아 먹으면, 훨씬 싼 가격에 맛있는 음식과 태양의 수혜를 동시에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여러 가지 샐러드를 조금씩 담아서 나와, 커다란 테이블 모퉁이에 자리를 잡았다. 어여쁜 샐러드의 각기 다른 맛과 색깔을 음미하며 오후 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퍼그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가 내가 앉아 있던 테이블 다리에 개의 목줄을 감아두고는 아보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델리나 마켓 코너에서 무언가 사가지고 나오려는 듯했다. 그런데 멀어지는 여자의 모습을 목을 빼고 쳐다보던 녀석이 여자가 안으로 사라지자마자 서럽게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에서는 가게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대부분 드나드는 사람들 관심을 받아가며 느긋하게 앉아 있다. 아마도 주인을 기다려본 경험이 별로 없는 새끼인가 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데릴러 올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녀석은, 쭈글거리는 얼굴을 더 불쌍하게 쭈그리고는 목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댔다. 그러던 중 목줄이 헐거워진 모양이었다. 녀석이 갑자기 여자가 사라진 쪽을 향해 짖으며 달려나갔다. 그러다 정문까지 못가 팽팽해진 목줄에 걸려 멈춰선 녀석은 목줄의 길이가 허락하는 동선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한 행인이 다시 목줄을 끌어다 테이블 다리에 묶어주고 있는데, 개의 주인이 쇼핑백을 들고 다가왔다. "줄이 헐거워졌나봐요. 인도에 나와서 서성대기에..." 여자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무릎을 굽혀 녀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잖아. 곧 온다고. 이제 괜찮아." 갑자기 순한 양처럼 얌전해진 녀석은 여자의 허벅지에 찰싹 기댄 채 행복한 신음을 질렀다. 끄으으으응.
그들이 떠난 뒤에도 녀석이 보여줬던 슬픔과 기쁨의 몸짓과 소리가 한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상대의 존재로 인해 깊은 행복과 안정을 느끼는 절대적 애정의 관계. 결국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리워질 것은 사랑을 주고받았던 사람들, 그 마음을 나누었던 시간이 아닐까. 재물이나 명성도, 내가 좋아했던 일도, 세계를 여행하며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놀라운 경험마저도 그땐 그리 중요할 것 같지 않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과 따듯한 포옹 한번 더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 문득, 어젯밤 존이 나쁜 꿈을 꾸다 잠을 깨서 중얼거리던 말이 떠오른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일 무서운 건, 네 얼굴을 더 이상 못 볼지도 모른다는 거였어."
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제까지 들어본 어떤 사랑고백보다 달콤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아무리 일상이 바쁘고 현실이 팍팍해도 '마음'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퍼그가 떠나간 자리에 서서 기도했다. 눈부신 햇살이 영원히 머물러 있을 것 같은 오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