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켓이 좋다

주말의 수선스러움이 그리워질 때

by Maya Lee

존이 일하는 토요일이라 혼자 더블린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토요일인데 일하는 남편도 불쌍하고 주말인데 혼자 보내야 하는 내 입장도 서러운데, 거기다 날씨까지 기분 나쁘게 을씨년스러웠다.(하긴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뜨듯한 전기장판에 배깔고 누워 감자칩과 맥주를 옆에 두고 컴퓨터로 영화나 몇 편 보고 싶은 날이었지만, 내 성격상 오후가 되면 후회할 것이 뻔했으므로 게으른 몸을 재촉해 존의 출근길에 따라 나섰다.


Temple Bar -Farmer's Market
토요일 낮에 더블린 시내에 가게 되면 꼭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토요일마다 템블바 미팅스퀘어에서 열리는 파머스마켓이다. 나의 단골집인 'Blazing Salad'에서 따뜻한 스프로 배를 채운 뒤, 템블바 마켓으로 향했다.
유기농 야채, 올리브와 치즈를 파는 가게를 제외하곤 인디언 커리, 멕시칸 부리또, 중국식 면볶음, 생굴과 와인, 스테이크 샌드위치, 크레페 등 배고픈 헝그리족을 위한 먹거리 가게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나의 단골집은 생과일과 야채를 즉석에서 갈아주는 주스가게다. 파인트 사이즈의 플라스틱컵에 가득 담아주는 주스가 4유로. 가격만 보면 싸다싶지 않지만, 한잔의 주스잔 속으로 갈려들어가는 과일과 야채의 양을 보고 있자면 꽤 만족스러워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스는 'Cleanser'. 당근, 비트루트(빨간 무), 사과, 샐러리, 생강을 함께 갈아 만드는데, 사과와 당근의 달콤함과 샐러리와 비트의 시원함, 톡 쏘는 생강의 깔끔한 뒷마무리까지, 과연 이제까지 먹어본 다양한 주스와 스무디 중 최고의 조합이다. (마시다 보면 이름처럼 정말 몸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든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템블바 마켓은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나도 처음엔 이것도 사먹어 보고 저것도 사먹어 보고 했는데, 이제 어떤 가게가 어디 있는지 외울 정도가 되고 보니 솔직히 관심이 시들해지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켓에 가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이유는, 토요일 낮 마켓의 활기와 수선스러움이 좋아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음식 냄새를 맡고, 웃고 떠들고, 가게 옆 간이 테이블에 서서, 혹은 벤치에 혹은 길바닥에 주저앉아 음식을 먹는다.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음식냄새가 가볍고 자유롭게 공기 속으로 섞여드는 느낌도 좋다.


또 하나, 더블린의 마켓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건 버스커들의 음악이다. 연주가 멋진 날이든, 그저 그렇고 그런 날이든 라이브음악이 있는 곳은 축제 같다. 오늘 발견한 버스커는 짙은 콧수염의 플룻 연주자다. 그리고 분주하게 그의 앞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멈춰서서 음악에 귀기울이는 남자가 있었다. 연주가 끝났을 때, 남자는 뮤지션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은 한참을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연주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한 사람을 만났으니, 그 버스커는 그의 앞에 놓인 동전의 갯수와 상관없이 분명 행복했을 것이다. 내 글에 마음으로 읽어주는 한 명의 독자를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행복처럼.


그리웠던 마켓의 낭만을 찾아서
어린 시절 가장 신나는 일 중 하나는 부모님을 따라 장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대형슈퍼마켓은 새로운 브랜드와 상품을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매대에 진열된 상품의 수와 종류가 너무 많아 위압감이 느끼지고 금세 피곤해졌다. 그보다는 노량진 수산시장이나 양재 꽃시장처럼 한 가지 주제로 특화된 시장들과, 도심에서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동네 5일장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런 장터에서는 사람 냄새가 났다. 물건 구경밖에 할 것 없는 슈퍼마켓과 달리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상인들이 직접 길러낸 자식 같은 산물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획일화된 상품과 달리 사람처럼 저마다 개성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장 보는 일이 '내 일'이 되고 보니, 돈과 시간이 문제였다. 자연스레 그냥 가까운 동네수퍼마켓을 이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래시장의 낭만은 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낭만을 다시 만난 건, 막 서른이 되어 호주와 뉴질랜드로 혼자 베낭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시드니처럼 큰 도시부터 이름도 기억 못하는 작은 타운까지 주말이면 각종 농산물과 먹거리를 파는 파머스마켓이 열렸고, 집에 묵혀 두었던 구제품이나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따위를 가지고 나와서 팔고사는 플리마켓은 구경하다 길을 잃어도 좋을 만큼 흥미로웠다. 특히 과일과 야채, 꽃을 파는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빛깔과 모양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지 경이감마저 들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자연경관을 볼 때도 신의 솜씨에 감탄하게 되지만, 때론 작은 한 알의 귤이나 양파에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 뒤로는 어느 나라로 여행을 가든지 '꼭 하고 싶은 일' 목록에 '재래시장, 파머스마켓, 플리마켓 구경하기'가 빠지지 않았다. 아일랜드에 처음 와서 더블린의 낯선 거리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본 것도 이런 마켓들이었다. 템블바 파머스 마켓을 시작으로, 일요일마다 'Grand Social' 펍에서 열리는 플리마켓과 올드템블바 거리에서 열리는 크래프트 마켓(액세서리, 직접 만든 엽서 등 핸드메이드 제품을 주로 판다), 역시 일요일마다 열리는 던리어리의 파머스마켓과 말라하이드의 파머스마켓, 호스의 선데이마켓, 토요일에 열리는 블랙락 마켓 등... 이렇게 하나하나 알게 된 다양한 마켓들이 아일랜드에서 심심하게 보낼 뻔한 수많은 주말을 구원해주었다.


Dublin Food CO-OP Market과 Green Door Market

마켓이 특별히 땡기는 날인가 보았다. 템블바 마켓을 나와 영화를 한편 보려고 IFI 영화관으로 향하던 중 마음이 바뀌어 방향을 틀었다. 다시 가보고 싶었던 다른 마켓 하나가 생각난 탓이다. 뉴마켓 스퀘어에 있는 '더블린 푸드 쿱' 마켓. 최근에 친구 기림이 덕분에 알게 된 이곳은 우리나라의 생협 같은 유럽 푸드조합에서 운영하는 마켓이다. 모든 야채와 과일이 유기농이고, 건물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는 그외의 다양한 종류의 친환경 제품들을 판다. 평일에도 문을 여는데, 토요일에는 과일이나 야채 가게뿐 아니라 베이커리, 인도음식, 스페인음식 등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푸드매장과 핸드메이드 액세서리, 중고책을 파는 가게들까지 빌딩 안을 가득 메운다.

작년 크리스마스데이 며칠 전 기림과 그의 프랜치 남편 다비드를 만나러 간 것이 이 마켓과의 첫 인연이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이곳에 와서 일주일치 장을 보고 브런치를 먹는다는 이 부부의 평화로운 토요일을 엿보고 싶기도 했고, 기림이에게 이 마켓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꼭 한번 가보려고 별러오던 차이기도 했다. 기림 부부를 만난 마켓 안의 '유기농 채식카페'는 분위기부터 '유기농'이었다. 낡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 가지가 수십 갈래로 자유롭게 뻗어나간 나무 벽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시 찾은 이날,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지만 지난 번에 맛보지 못한 이 카페의 음식이 너무나도 궁금해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주문했다.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빵과 스프, 샌드위치, 커피, 케이크 모두 유기농 재료로 만드는데, 내가 시킨 당근스프도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 약간 심심하면서도 당근 본연의 향과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근과 코리엔더(고수)가 최고의 궁합이라는 것도 아일랜드의 당근스프를 먹으면서 알게 된 사실! 그야말로 토끼로 변신할 것 같은 자연의 맛..하, 어쨌든 내 입맛에는 딱이었다.

더블린 푸드 쿱과 형제처럼 붙어 있는 '그린도어 마켓'도 사랑스럽다. 큰 물류창고처럼 너르고 네모난 공간 여기저기 다른 종류의 가게가 둥지를 틀고 있는데, 더블린 푸드 쿱에 비해 조금 휑하면서도 한편으론 쿨한 느낌이랄까. 그린도어 마켓 입구에서 스탠다드 재즈 넘버들을 열창하는 여자 버스커의 멜랑콜리한 목소리가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를 더욱 멜랑콜리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멜랑콜리'를 벗어날 수 없는 날이었지만, 마켓의 낭만으로 배부른 나는(물론 엄청난 양의 당근스프를 남김 없이 비운 덕에 신체적으로도 배불렀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걷는 토요일 오후의 거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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