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의 새벽하늘이 말을 걸다

아일랜드 귀국과 친구의 방문

by Maya Lee


곧바로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지 않은 게 실수였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난 시각은 아침 5시반. 써머타임을 시작한 아일랜드의 하늘은 벌써 만물이 낯을 드러내도록 밝아 있었다. 한국에서 하루가 다르게 포근해지는 봄기운을 만끽하다 다시 아일랜드의 날선 추위 속으로 돌아와 보니, 한국에서는 서서히 길어지고 있던 해가 아일랜드에서는 한순간에 길어진 느낌이었다. 날씨의 변화와 해의 길이가 꼭 정비례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그런 변화가 새롭고 낯설어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창문 옆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 잠이 완전히 날아간 것이다. 어쩌면 브레이의 익숙한 내 방이 아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더블린 시내에 있는 허름한 B&B의 옥탑방이었다. 존과 나는 가끔 더블린에서 밤늦게까지 머물 일이 있거나 기분전환을 하고 싶은데 멀리 여행을 떠날 형편이 안될 때, 이렇게 더블린 시내에 있는 숙소에서 밤을 지내곤 한다. 이번에는 나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에 와 있는 은아언니와 밤늦게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리도 이틀째 더블린에 머무는 중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열심히 잠을 청해 봤지만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해졌고, 억지로 등짝을 붙이고 있는 네모난 침대와 네모난 방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급기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따뜻한 커피와 크루아상의 이미지가 감은 눈속의 검음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맙소사, 커피와 크루아상이라니! 며칠째 죽은 줄 알았던 식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건 내 몸상태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요 며칠 급체에 몸살까지 겹쳐 거의 아무것도 못먹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아프기는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하필 귀한 친구가 나를 보러 아일랜드에 온 그때일 필요는 뭐란 말인가. 은아언니가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날 저녁부터 먹은 걸 토한 후로 꼬박 하루 반을 굶다시피 하면서 숙소의 침대에 누워 보냈다. 결국 어제 데이투어로 클리프모어를 함께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언니 혼자 보내야 했다. 몸만 일으키면 어질어질 토할 것 같은 내 상태도 괴로웠지만, 중간에 어중간하게 낀 존도 그렇고, 무엇보다 나를 걱정해주느라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언니한테 미안했다. 아마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차와 날씨 적응도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친한 친구 온다고 들떠서 무리하게 일정을 추진한 게 무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드디어 미슥거림이 가시고 단순한 배고픔이 아닌 진정한 식욕이 찾아왔으니 분명 내 몸이 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삶에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침산책. 갑자기 새벽공기가 너무나 마시고 싶었다. 더구나 더블린의 새벽풍경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일 터였다.
"자기야, 나 좀 나갔다 올게..."
"Where?"
존이 이게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하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 봤다. 눈은 반쯤 감긴 채다.
"다시 자보려 했는데 잠이 통 안와서, 자기 일어날 때까지 아침산책 좀 하고 오려고."
"O....kay..."
대답과 동시에 다시 잠속으로 골인하는 존을 남겨두고, 혼자 더블린의 새벽 거리로 나섰다. 옷품을 파고 드는 차갑고 상쾌한 공기. 아일랜드는 나에게 '쌀쌀맞지만 솔직하고 맑아 버릴 수 없는 애인' 같다.
가디널 스트리트를 지나 탈봇 스트리트로, 구름이라도 뚫을 듯 뾰족하게 솓은 원기둥의 스파이어를 향해 걸었다. 더블린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리는 건축물이지만, 새벽빛을 받아 반짝이는 날씬한 몸통이 나름 예뻐 보였다. 나의 목적지는 오코넬 스트리트에 있는 24시간 맥도날드. 오래 전 시티에서 단기로 방을 쉐어한 적이 있는데, 아침잠이 없는 나는 옆침대에서 자고 있는 동생이 깰까봐 눈을 뜨면 늘 집을 나서는 버릇이 있었다. 그때 커피 한잔과 책을 앞에 두고 이른 아침의 고요한 자유를 즐기곤 하던 곳이 바로 이 맥도날드다.
커피와 크루아상을 사가지고 2층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몇 년만에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자리에 앉아 비슷한 색깔의 아침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 당시 이곳에 앉아 내가 생각하던 것, 느꼈던 감정들까지 어슴프레 생각이 났다. 몇 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크루아상은 조금 눅눅하고 커피는 조금 썼다. 그런데도 아주 맛있게 느껴졌다. 겨우 달래놓은 속이 덧날까 걱정하면서도, 크루아상과 커피를 번차례로 흡입하듯 베어물었다. 다행히 위장의 동요는 없었다. 하루만 굶어도 내가 매일 당연한 듯 누리던 맛과 향이 이렇게 그리워지는 걸 보면, 일탈보다 관성의 힘이 더 강력한 모양이다.
나는 창 너머 점점 밝아오는 더블린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패드의 전원을 올렸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첫글을 오랜만에 다시 만난 더블린의 아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8시. 남은 오후햇살이 코발드색 저녁하늘 속으로 신비롭게 섞여드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존과 함께 오코넬브릿지 앞에서 클리프모어 투어에서 돌아오는 언니를 기다렸다. 10분쯤 뒤 언니가 탄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에서 내리는 은아언니를 존과 내가 큰 허그로 맞았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느라 지쳤을 법도 한데 언니는 대자연의 정기를 받고 와서인지 생기가 넘쳤다. 우리는 '이탈리안 쿼터'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따뜻한 스프와 파스타, 피자를 저녁으로 먹고, 리피강 곁의 아이리쉬펍에서 맥주를 곁들여 라이브음악을 들었다.
다음날은 언니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날. 언니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내 몸상태를 걱정해, 쉬엄쉬엄 다니자 했다. 속이 많이 나아진 덕분에 언니랑 나의 단골 샐러드바 'Blazing Salad'에서 샐러드도 먹고, 체스터비티 도서관의 전시도 같이 둘러볼 수 있었다. 유리천장을 통해 자연빛이 내리는 갤러리 카페에서 한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 내가 제안했다. "언니, 우리 존이랑 만나 저녁먹기 전에 둘이 산책 좀 할래?"
내가 가장 좋아하는 포토벨로의 산책로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사실 나뿐 아니라 많은 더블리너들에게 사랑받는 길이다. 인공적인 조형물 대신 자연스럽게 자라는 갈대와 수풀, 청둥오리와 백조들이 자유롭게 노니는 이 작은 개천길을, 언니도 분명 좋아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했다. "와아, 여기 정말 좋다아...정말 좋아. 여긴 너 없었으면 와볼리 없는 곳이잖아. 아아, 평화롭다..." 눈부신 오후햇살에 반사되는 언니의 미소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 100년 전 모습 그대로 더블린시티 남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을 따라, 개와 산책하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담소를 즐기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우리도 그들 사이로 걸으며 관광객이 아닌 진짜 더블리너들의 일상 속으로 함께 녹아들었다.


이후 우리 셋은 레바논 음식으로 만찬을 나누고, 콘서트홀에서 <1916 이스터라이징> 특별공연 시리즈의 하나를 감상하며 우리의 마지막밤을 즐겼다. 그리고, 브레이 아파트로 돌아와 언니의 큰 짐을 차에 싣고 언니가 예약해둔 공항 근처 호텔로 다함께 출발했다. 언니는 오전6시 파리를 경유해 서울로 가는 새벽비행기를 타야 했다. 언니를 도와 짐을 방까지 옮겨놓고, 우리는 그곳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언니와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슬픈 감정도 모르겠다"고 말하며 큭큭 웃었지만, 사실 우리는 슬퍼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니가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게 존과 나는 서둘러 호텔을 나와 차에 탔다. 차를 돌려 정문으로 나가면서 호텔 건물을 올려다 보니 2층 호텔방 창에서 언니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언니가 활짝 웃으며 양손을 흔들었다. 나와 존도 언니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목련을 닮은 언니. 나를 만나러 이 먼 땅까지 와주어 고마워...언니 덕분에 지난 며칠 내 마음이 따뜻한 봄이었어.

우리의 작고 늙은 차가 캄캄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만큼 더블린공항의 빨간 불빛들이 바쁘게 깜박이고 있었다. 지난 몇일 사이, 은아언니를 알아온 지난 10년보다 더 많이 언니를 알게 되고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일랜드의 하늘과 땅, 구름과 햇빛과 바람이 우리를 특별한 시간 속에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손님맞이와 함께 나도 아일랜드 귀국 신고식을 무사히 치렀으니,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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