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

아일랜드의 봄꽃들처럼 강하고 예민하게

by Maya Lee

"아직도 입김이 나오네, 봐봐."
존을 따라나선 아침 출근길. 나는 투덜거리며 존에게 하얀 입김을 뿜어 보여줬다. 벌써 4월 중순이 되어가는데 봄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이 무겁고 둔한 노스페이스 검정자켓만 벗을 수 있어도 좋으련만.
"그래도 햇빛이 이렇게 눈부시잖아! 나이스 모닝~"
존의 말이 맞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눈을 제대로 못뜰 정도로 햇빛이 눈부셨다. 차가운 바람을 피해 몸을 옹숭거리며, 나도 "맞아, 나이스 모닝"이라 화답했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봄꽃들과 새싹이 돋는 나뭇가지들, 점점 더 오랜 시간 하늘에 머무는 태양. 나는 여전히 겨울스웨터와 유니클로 히트텍을 입고도 '추워!'를 연발하고 있지만, 내가 보는 풍경들이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사실, 아일랜드에도 봄이 왔다.
이처럼 계절은 언제나 인간의 감각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제 때를 알고 온다는 걸, 아일랜드에 살면서 알았다. 어떻게 이 혹독한 비바람 속에서도 여전히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불친절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강인함과 미세한 일조량, 온도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채 반응할 수 있는 섬세함을 함께 지닌 아일랜드의 봄꽃들.

한국은 계절별로 기온차가 크고, 꽃샘추위, 장마, 태풍, 단풍이 화려하게 물드는 가을과 눈 오는 겨울로 흐르는 시간의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지만 아일랜드는 연중 일교차가 크지 않은 이유다. 그저 비가 더 많이 오고 더 추운 겨울과 비가 조금 덜 오고 덜 추운 여름 사이에 경계가 애매모호한 봄과 가을이 끼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루 단위의 아일랜드는 어느 나라보다도 변화무쌍하다. 아일랜드에 하루만 머물러 보면 '아일랜드에는 하루에 사계절이 있다'는 말에 누구라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이런 희한한 아일랜드의 날씨 덕분에 3개월씩 나눠 계절을 정의해온 내 방식에 태클이 걸렸다. 즉 3월부터 5월은 봄, 6월부터 8월은 여름, 9월부터 11월은 가을, 12월부터 2월까지 겨울이라고 생각하며 40년을 살았는데, 이제 이런 구분이 별로 의미 없어진 것이다. 봄이 공식적인 입장을 선언하는 '입춘'이나 개구리 튀어나오는 '경칩'의 룰을 순순히 따르기에, 아일랜드의 봄은 다분히 반항적이며 즉흥적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이곳에서 봄은, 3월일 수도 있고 4월일 수도 있고, 보통 여름이라 부르는 7월의 어느 날일 수도 있다. 아일랜드의 봄꽃들처럼 당신만의 방식으로 생동하는 우주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할 때가 바로 봄인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봄을 기다리는 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바라는 '신앙'의 여정과 닮았다. 난 내가 피부로 느끼는 온도나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봄을 찾기보다, 내 안의 변화로부터 봄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먼저 친구들에게 전화나 메시지로 봄안부를 전하거나 봄맞이 데이트 신청을 하고, 한국에 다녀오느라 잠시 쉬었던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듯 움츠렸던 몸의 세포들이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그리고 스페인문화원에서 다시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굳은 뇌에도 적당한 긴장과 자극으로 기름칠하기. 무엇보다 신나는 봄소식은 존과 함께 시작한 엉뚱하고 뻔뻔한 밴드 프로젝트다. 밴드 이름은 존이 내 별명을 따서 유치찬란하게 <블랙독 밴드>라 지었다. 우리는 우리 둘이 함께 만든 노래와 내가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들, 아이리쉬 발라드 몇 곡을 함께 연습하기로 했다. 옷장에서 잠자고 있던 바우런(아이리쉬 전통 북)도 꺼내 먼지를 털었다. 존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로 '월튼 뮤직스쿨'에서 운영하는 바우런 강의의 수업료를 내주겠단다. 기타는 존이 직접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니 나를 둘러싼 우주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날씨가 아무리 쌀쌀맞게 굴어도 새 봄이 올 것을 믿고 마중 나섰더니, 봄이 삶 속으로 먼저 들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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