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흐르는 음악을 찾아서

아이리쉬 전통악기 Bodhran 배우기

by Maya Lee

'아 유 레디? 뱅, 뱅 더 드럼!'
존의 문자를 확인하고 내 왼쪽 손에 들린 묵직한 것을 내려다 봤다. 둥글고 검은 가방,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아일랜드 전통악기인 '바우런(Bodhran)'이다. 우리나라 북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쪽만 가죽으로 덮여 있고 다른 한쪽은 뻥 뚫려 있거나 중간에 손잡이 역할을 하는 바가 하나, 혹은 십자로 두 개가 가로질러 있다.
'드디어 오늘이군!' 월튼뮤직스쿨에서 바우런 첫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존이 한국방문 선물이라며 인천국제공항에 들고 나타났던 것을 부모님 아파트의 내 방 옷장 안에 고이 모셔놓은지 3년 만에 아일랜드로 가지고 왔고, 다시 몇달 만에 제대로 배워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내가 바우런을 배우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야말로 존의 깜짝선물이었는데, 왜 굳이 바우런을(꽤 무게가 나가는데다 가져오기 딱 번거로운) 사왔는지 물어본 적은 없다. 아마도 뭔가 아이리쉬스러운 선물을 고민하다 선택했으리라. 사실을 말하자면 난 음악에 그리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다. 노래를 못하는 편은 아니나, 음감이 뛰어나거나 악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때 음악을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라디오를 듣다가 귀에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음반을 찾아 사들이고, 특히 음악이 감동을 더하는 영화를 만날 때마다 영화음악 OST를 사모으고, 한창 재즈에 빠져 재즈라이브클럽을 찾아다니며 음악을 듣던 때가. 그러다 어느 순간 음악을 찾아 듣고 있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특히 글을 쓸 때는 적막한 것이 더 좋았고, 여행을 하며 길 위에 있을 때는 자연의 소리든 도시의 소음이든 주변에서 들려오는 삶의 소리를 듣는 것이 더 좋았다. 음악에 해박하고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면 내 모자란 음악성이 조금 슬펐으나, 인정하길, 난 청각보다 시각과 미각, 후각이 더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뮤지션 남편을 만난 거다. 직업으로서 요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순수한 열정과 관심의 측면에서 보면, 음악이 전부인 남자. 사람은 원래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법이니, 어쩌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만.


"같이 노래도 만들고 연주도 하는 거야. 상상해 봐, 우리가 기타 하나씩 둘러메고 남미의 어느 길 위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완전 흥분된다 흥분돼. 하하하!"
우리 엄마가 들었으면 기겁하셨을 제안을, 존은 평소 농담이 아닌 진담으로 잘도 한다. 하긴 이런 철없음이 서로 맞아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수많은 뮤지션들과 함께 밴드활동을 하며 자유분방하게 살던 남편이 늦깎이 결혼을 하며 얻은 것은 바로 자신과 똑같이 철없는 아내, 바로 나. 여행 좋아하고, 영화랑 공연 좋아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는 거 좋아하는 건 똑같은데, 그의 음악적 욕구를 채워줄 뮤직파트너로서는 한참 모자라니 은근히 미안할 뿐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맞은 첫번째 크리스마스, 그는 나에게 장난감처럼 작은 파란색 기타를 선물했다. 그때 기타를 갖고 싶다고 한 건 나였다. 사실 꼭 뮤직광팬이 아니더라도 기타 같은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바람은 흔하게 불곤 하니까. 그리고 존을 졸라 기본적인 기타코트를 배웠다. 대학교 1학년 때 기타치는 사람이 멋있어 보여 언니 기타를 들고 딱 한달 동네 기타학원에 다녔던 것 말고는 처음이었다. 처음이니 재밌었다. 하지만 몇 달 못가 내 파란색 기타는 방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하얗게 덮어쓰고 숙면에 들어갔다.
더 좋은 도구를 가지면 더 열심히 잘 할 거라는 착각은 왜 끈질기게 지속되는 걸까. 어릴 땐 새 공책에 새 연필로 필기를 하면 더 공부가 잘 되는 것 같았고, 여행하며 사진을 제대로 찍어보겠다고 입문자용 DSLR를 사서는 자동모드로만 계속 찍으면서 더 성능 좋고 디자인 예쁜 DSLR 카메라를 사면 왠지 사진을 더 열심히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해 크리스마스가 되어 존이 뭘 가지고 싶은지 물었을 때, 난 먼지 쌓인 파란색 기타를 보며 말했다.
"새 기타 갖고 싶어. 저건 줄도 플라스틱이고 너무 장난감 같이 작아서 제대로 소리가 안나는 걸. 제대로 된 기타만 있으면 진짜 열심히 연습할 텐데...!"
순진하고 착한 남편은 잔소리 한 마디 없이 철없는 아내에게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새 기타를 사줬다. 프로뮤지션이 사용하는 기타보다는 작은 사이즈지만 연주용으로 손색이 없었고 제법 폼도 났다. 새 기타가 생기니 마음은 벌써 뮤지션이었다. 매일 기타를 꺼내 잊어버렸던 기본코드를 다시 연습하고 존에게 물어 새로운 코드도 몇 개 더 배웠다. 갑자기 창작에 대한 열정도 샘솟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기타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아 가사를 몇 줄 쓰고 아는 코드를 총동원해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흥얼거렸다. 한동안 멀어졌던 '음악'과 다시 조금씩 친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짝거렸던 열정은 잠시, 언젠가부터 여유시간이 생기면 기타를 치기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싶어지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나의 새 기타가 작은 파란색 기타가 놓였던 옷장 곁을 지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을 즈음, 뉴페이스, 바우런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서 바우런 배울래?" 방앗간 앞을 그냥 못지나는 참새처럼 월튼뮤직숍에 들러 기타를 구경하고 나온 존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뮤직스쿨 간판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고 싶다면 수업료 내줄게. 우리 결혼 3주년 선물로." 그의 말에 가슴이 뛰었다. 이번엔 얼마나 오래 열심을 내서 연습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시작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2주전 등록을 하고 기다려온 첫수업. 해가 많이 길어져 대낮처럼 눈부신 더블린의 저녁거리를 설레는 마음으로 거닐다 월튼뮤직스쿨의 계단을 올랐다.
나의 바우런 선생님 이름은 '알란'. 바우런뿐 아니라 기타, 반조, 피들(바이올린) 연주자로도 활동하는 다재다능한 뮤지션이다. 알란은 열네 살 때부터 독학으로 배운 바우런을 어깨에 메고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연주를 해왔다고 했다. 난 인사동에서 본 도인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러 하나로 묶고, 가끔씩 '으하하하!'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웃는 그가 단번에 좋아졌다. 나와 함께 수업을 듣게 될 사람들은 모두 5명. 나를 빼곤 모두 아이리쉬다.
첫시간인 만큼 바우런이란 악기를 이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바우런은 아이리쉬 전통음악에서 빠질 수 없는 악기로 역사가 3000년이나 되었단다. 현재 서양음악의 기본이 되는 4박자 리듬이 생기기도 전에 자생적으로 창조된 리듬을 가지고 연주되었다. 전통적인 바우런은 소나 염소의 가죽으로 만들며, 가죽 표면에 물을 발라가며 튜닝을 한다.
"연주하는 모습은 단순해 보이지만, 연주할수록 자유롭고 다양한 가능성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는 알란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도 바로 바우런. 북채를 잡는 법과 기본이 되는 리듬 몇 가지를 연주로 먼저 보여준 그가, 우리에게 "직접 채를 잡고 소리를 내보라"고 했다. 처음에 어색하고 수줍었던 소리들은 손놀림이 반복될수록 조금 더 자신 있고 유연하게 바뀌었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졌던 리듬도 조금씩 호흡이 맞아들었다. 문득, 3천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아이리쉬들의 심장박동 소리가 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리의 기나긴 파장이,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한 동양여자의 마음에까지 와 닿은 것일지도.
음악에 특별한 재능과 열정이 있든 없는 상관 없이, 누구의 삶에나 음악이 흐른다. 어떤 이의 마음엔 헨델의 메시야 같은 음악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엔 쇼팽의 즉흥환상곡 같은 음악이, (또 누군가에겐 싸이의 강남스타일 같은 음악이!) 저마다 다른 리듬과 멜로디, 강약과 빠르기로 흘러간다. 첫수업응 마친 후 집에서 바우런 채를 잡고 둥근 크림색 몸통을 둥둥 두두릴 때마다 궁금해진다. 나의 삶엔, 그리고 내 마음엔 지금 어떤 음악이 흐르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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