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은 국제 재즈축제 'Bray jazz festival'
"오..브레이! 좋은 데 사네? 브레이 참 아름답지!" 사람들은 내가 브레이에 산다고 하면 보통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어 묻는다. Do you like Bray?
망설임 없이, 브레이는 아름답다. 그레이스톤까지 이어지는 절벽길과 전설 같은 십자가가 서 있는 브레이헤드의 절경, 작지만 운치 있는 브레이하버, 씨프런트를 따라 곧게 뻗은 산책로와 넓은 잔디밭은 물론, 바닷가를 마주하고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 펍, 호텔 등 편의시설과 더블린에서 4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근접성까지 갖추고 있어, 더블리너들이 즐겨찾는 주말나들이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Do you like it?'에 대한 내 대답도 망설임 없이 'Yes'다. 오래지 않아 이사를 갈 생각도 하고 있지만, 어쨌든 브레이는 지금 내가 살고 있고 정도 많이 든 '내 동네'다.
하지만 1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꼭 몇 초간 뜸을 들였다. 사실 내 솔직한 마음을 잘 몰라서 생각하다가 그냥 그렇게 대답해 버리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매일 더블린이나 던리어리, 블랙락 등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냈지, 정작 '내 동네로서의 브레이'를 즐긴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면 브레이를 '머지않아 떠날 곳'으로 생각해서 부러 정을 주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브레이에 살게 된 건, 결혼하고 존이 살고 있던 브레이의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다. 넓진 않지만 푸른 숲과 아담한 강줄기를 거실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집이다. 연애시절 존과의 두 번째 데이트, 점심식사에 초대를 받아 처음 이 집에 왔었다. 여름이라 숲은 짙은 녹색으로 울창하고 새들의 지저귐은 선명했다. 여러 개의 기타와 반조, 부주키, 각종 음향기기로 가득한 거실에 앉아 그가 요리하고 있는 파스타 냄새를 맡고 있을 땐, 이렇게 낭만적인 집이 또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막상 바로 그 집에서 살게 되고 보니, 현실적인 것들이 먼저 보였다. 당시 옆 방에 '라파엘'이란 폴란드 남자가 3년째 세들어 살고 있었는데, 존에겐 익숙한 동거였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가뜩이나 낯선 동네, 낯선 집에서 남편 외의 낯선 사람과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이 버거웠다.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 잘못이 아닌데도 왠지 신혼생활을 침범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 나가달라고 할 수 없는 사정을 알았기에, 참아야 했다. 숲이 보이는 멋진 신혼집에 난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내 취향이나 선택과 무관하게 그곳에 원래 놓여있던 가구와 살림살이가 영 내것 같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브레이 다트역이나 더블린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려면 4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지나는 길에 예쁜 공원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개들도 실컷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은 얘기가 달랐다. 우산도 소용없이 사선으로 달려드는 빗줄기에 고스란히 젖어들며, 미끌대고 질척거리는 공원 잔디밭을 걸을 땐 다트역이 천리길처럼 느껴졌다. 문제는 이런 날이 화창하고 걷기 좋은 날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 언젠가부터 난 날씨와 거리와 집과 플랫메이트에 대한 불평을 입에 달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이 속상했고, 다시 행복하고 싶어졌다.
나는 불평하는 나쁜 버릇을 멈추고 브레이에게 마음을 열어보기로 했다. 일단 더블린에서 친구를 만날 약속이나 특별한 해야할 일이 있는 날이 아니면 브레이에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안 가본 골목도 걸어보고, 그냥 스쳐갔던 가게와 카페들도 눈여겨 보고, 그러다 혹시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겉으로는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아일랜드의 타운들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저마다 특징이 있음을 알게 된다. 브레이는 '브레이 악센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토박이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애들이 동네를 자기 집처럼 츄리닝 바람으로 돌아다니고, 집으로 가는 로컬버스를 타면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더블린 통근권이지만 위클로마운틴 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시골스럽고 고립된 느낌마저 든다. 존의 말로는, 그가 브레이에 살기 시작한 10년 전만 해도 안전하고 깨끗한 타운이었는데 몇 해 전부터 외곽에 집시촌이 형성되고 마약거래가 성행하면서 폭력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기 시작했단다. 그래도 브레이 출신 예술가들의 지역모임과 특색 있는 이벤트가 활발하게 열리는, 생동하는 동네인 것만은 확실하다.
브레이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나에게도 아지트가 생겼다. 브레이 유일의 공연장인 머메이드 아트센터에 딸린 카페와 브레이해변 맞은편 길 모퉁이에 숨어 있는 아담한 이탈리언 델리, 그리고 공원을 빠져나오자마자 한숨 돌리기 좋은 스타벅스... 동네와 친해지는 또 하나의 방법은 동네에서 열리는 이벤트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다. 매년 여름마다 브레이해변에서 펼쳐지는 항공쇼가 가장 유명하지만, 최근 존과 내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매년 4~5월에 열리는 '브레이 재즈페스티벌'이다. <올댓재즈>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제재즈페스티벌'이라고 소개한 브레이 재즈페스티벌은, 17년 전 브레이에서 시작되어 조금씩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다. '국제 재즈페스티벌'이란 이름에 걸맞게, 매년 동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재즈뮤지션들이 각국에서 작은 타운 브레이를 찾아온다. 지난해 브라질의 대표적인 재즈뮤지션의 공연을 보고 '삘 받은' 우리는 올해도 일찌감치 헤드라인 공연 2개를 예매해 두었다.
2016 브레이 재즈 페스티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4월의 마지막 금요일, 나는 하루종일 브레이에 머물며 축제를 즐겼다. 멕시칸 친구 자이라를 브레이로 초대해 멕시칸 브리또를 점심으로 먹고, 웰 교회에서 오후 1시에 열리는 멕시칸 재즈피아니스트 '알렉스 메르카도'의 공연을 함께 보았다. 자이라와 같은 멕시코시티 출신의 알렉스는 그의 고향 멕시코시티에 대한 달콤쌉싸름한 감정,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적 시선과 필연적인 고독을 솔로피아노의 감성적인 선율로 들려주었다. 우리는 공연을 맛있게 음미한 뒤 머메이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오래도록 수다를 떨었다. 자이라와 헤어진 후 퇴근하고 온 존을 만나 스웨덴 밴드 <마그너스 오스트롬>의 공연을 보러 머메이드 아트센터로 향했다.
스웨덴 밴드 마그너스 오스트롬은 북유럽 특유의 서늘하고 세련된 느낌으로 모던재즈의 바로미터를 보여주었다. 피아노와 드럼, 두 대의 기타와 키보드의 즉흥적인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끊임없이 변주되는 멜로디와 리듬은 긴장감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번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는 다음날 저녁 펼쳐진 아프리칸 뮤지션 '도베 그나호레'의 무대였다. 아프리카 전통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을 재즈로 발전시킨 독특한 음악과 도베의 깊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관중을 몰입시켰다. 특히 그녀는 간주가 흐를 때마다 아프리카 전통춤을 추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는데, 그녀의 검고 빛나는 육체가 날랜 한 마리 동물처럼 무대를 누비며 뿜어내는 강력한 에너지에 내 몸에도 전율이 흘렀다. 공연이 끝나고 거리로 나섰지만 짜릿한 감동은 가시지 않았다. 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아이보리 코스트에서 온 그녀가, 브레이의 서늘한 밤공기를 아프리카 대륙의 열기로 덥혀주고 있었다.
공간과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 사이와 비슷해서 지속적인 만남을 통한 시간과 기억의 공유를 통해 발전한다. 나는 이틀의 시간 동안 브레이란 공간과 재즈의 선율을 공유하고 나의 친구와 보낸 시간을 공유했다. 이렇게 브레이에 대한 추억이 하나 더 쌓였다. 빛과 바람이 좋은 봄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