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목적지, Waterford

때론 길 위의 과정이 여행이다

by Maya Lee

워터포드에 가기로 한 건, 존과 내가 잠들기 5분 전 내린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존은 이미 자려고 누워 있고, 난 침대맡에 기대 휴대폰으로 마지막 페북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 주말에 삼일이나 쉬는데 그냥 집에 있긴 아깝다...뭐 재밌는 일 없을까?" 이미 반쯤 감긴 눈을 애써 뜨며 존이 물었다.
5월 2일 월요일은 '뱅크할리데이'(Bank Holiday.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은행 노는 날'. 모든 공공기관과 일터가 쉬는 아일랜드 국가공휴일로 한두달에 한번 꼴로 빨간 월요일이 찾아온다. 존을 비롯한 몇몇 아이리쉬에게 물어봤으나 정확한 출처는 아무도 모름). 듣고 보니 나도 모처럼 맞는 연휴 생각에 몸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휴대폰으로 메일함을 열어 소셜커머스회사에서 보낸 최근 메일을 클릭, 주르륵 흩어보다 눈에 딱 꽂힌 '스페셜 오퍼'가 있었다.
<워터포드, 4스타 호텔 2인숙박 및 디너 메인코스와 풀 아이리쉬 브랙퍼스트 포함 - 67유로>
"자기야, 이거 봐봐!"
"오...이거 진짜야? 어떻게 이렇게 쌀 수가 있지? 다시 잘 확인해봐."
"맞아. 다시 확인해 봤어. 헉, 근데 구매마감 시간이 20분 남았다고 떠.."
"정말? 그냥 사, 그냥 사."
존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신용카드를 꺼내왔고, 나는 재빠르게 구매버튼을 눌러 카드 정보를 입력했다. 클릭. 결제 완료. 충동적으로 질렀을 때 찾아오는 불안감도 잠시, 우리는 이내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들뜬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더블린에 있는 'St. Marks Church'에서 가장 이른 예배를 드리고 바로 워터포드로 향했다. 워터포드는 아일랜드 남동쪽, 코크와 이웃한 지방으로,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산업대학과 큰 공장들이 있는 곳이다. 마치 늘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부산과 이웃한 산업도시 울산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나에겐 오히려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워터포드는 고속도로를 타고 쉬지 않고 달리면 2시간 안에 닿는 곳이지만, 우린 바다와 들판, 작은 마을들을 지나는 지방도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리고 전에도 주말여행으로 몇 번 가봤으니 이번엔 시내구경을 열심히 하기보다 길 위의 과정을 즐기며 쉬엄쉬엄 가는 걸로.


보통 목적지에 빨리 가야할 특별한 이유가 없을 땐,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지명을 따라 옆길로 새곤 한다. '킬(Kill)'이란 이름이 재미있어 가봤다가 황무지처럼 아무 볼 것 없는 동네라 실망하기도 하고, 코크 가는 길에 점심이나 먹고 갈까 하고 찾은 작은 타운 '더로우(Durrow)'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나중에 일부러 다시 찾아가기도 했다. 더로우는 내가 가본 아일랜드 타운 중 가장 생기 넘치는 곳이었다. '아일랜드의 가장 깨끗한 타운'에 선정되었을 만큼 주민들 스스로 거리를 깨끗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동네축제가 한번 열리면 한 집도 빠짐없이 참여해 함께 축제를 즐긴다. 우리가 처음 갔을 때는 마침 '스캐어크로우 페스티벌'(Scarecrow festival; 허수아비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아기, 소녀, 할아버지, 뮤지션, 경찰관, 소방관 허수아비... 집집마다 직접 만든 허수아비를 대문 앞에 세워두거나 나무에 걸어두어 마을 전체가 거대한 야외전시장 같았다. 또 한번은 지방도로를 달리다 우연히 '바닷가 가는 길'이라고 쓰인 낡은 나무화살표가 가리키는 좁은 숲길로 들어섰다가,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바다가 바위절벽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작은 무인해변을 발견한 적도 있다.


이런 '즉흥적 경로이탈'은 존과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모험이자 특별한 여행의 재미다. 이번엔 위클로 산길을 따라가다 숲속별장처럼 호젓하고 아름다운 호텔을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19세기 맨션을 개조한 듯 엔틱한 식당에서 우리는 와인을 곁들인 아늑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길 위에 올랐다.
워터포드 시티에 들어서면서 구글맵으로 우리가 예약한 호텔을 찾아 보니, 시티에서 차로 10분쯤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어쩐지 싸다했더니..! 하긴, 숙박료에 저녁과 아침 식사까지 포함된 가격이 너무 착해 충동적으로 질러버리면서 위치는 확인도 안했던 것이다. '바이킹 호텔'은 전혀 바이킹스럽지 않은, 심플하고 모던한 자태를 드러냈다. 큰 도로 바로 옆에 있다는 점이나 깍둑썰기로 생긴 건물 외관이나 그리 맘에 들진 않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침부터 후둑이는 빗방울이나 정신머리 없이 부는 바람 따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그저 훌쩍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가고 싶었고, 워터포드에 도착할 때까지 길 위에서 보낸 반나절의 소소한 여정을 즐겼다. 이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따뜻한 샤워와 사각거리는 침대시트 위에 눕는 것, 그리고 달콤한 씨에스타. 우리는 그렇게 일과 사람들, 복잡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은 잠시 잊고, 진공상태의 휴식을 즐겼다. 눈을 뜨니 저녁 6시.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창밖 풍경은 제 시간보다 훨씬 앞선 듯 느껴졌다. "시티 구경하는 건 내일 하고, 오늘은 그냥 이렇게 쉬는 거 어때?" 존이 캐틀(Kettle: 전기포트를 부르는 영국영어)에 물을 올리며 물었다. 사실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는 호텔방에서 커피를 한잔씩 만들어 마시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한 사람당 27유로씩 하는 풀코스 메뉴를 웃돈 안주고 먹었으니 본전은 제대로 뽑은 셈이다.

한없이 게으르고 평화로운 밤을 보내고 일찍 눈을 떴다. '어제 쉴 만큼 쉬었으니 오늘은 좀 부지런히 돌아다녀보자' 싶어, 우리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으러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조식까지 가격에 포함되어 있으니 이번 여행은 제대로 먹방이다. 여행을 오면 나도 꼭 평소엔 안 먹던 아이리쉬 브랙퍼스트를 먹는다. 원래 풀 버전은 소세지, 베이컨, 볶은 버섯, 구운 토마토, 스크램블에그, 블랙푸딩 또는 화이트푸딩, 토마토소스에 조린 하얀콩. 이 중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토마토, 버섯, 콩 요리 정도지만 토스트랑 곁들여 먹으면 충분하다. 맛보다는 여행 온 기분이 나서 좋아하는 여행습관 중 하나다.
아침을 먹자마자 체크아웃을 하고 차를 몰고 워터포드 시내로 갔다. 아침에 해가 나길래 다행이다 했더니, 5분 간격으로 비가 쏟아졌다가 다시 해가 반짝 나기를 반복했다. 방정맞은 아일랜드 날씨라니! 우리도 그 간격에 맞춰 비가 올 땐 서점이나 옷가게 안에 들어가 구경하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거리로 나와 걸었다. 햇살이 눈부셨던 짧은 시간 동안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볕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큰 배들이 정박해 있는 강가를 따라 걷고 있는데 다시 비가 오기 시작했고, 이번엔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다. 젖는 것이 귀찮긴 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날씨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집이 아닌 집에서 뒹굴거리며 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곳을 서성이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도시가 아닌 워터포트여야 하는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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