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와 루이즈 집 바베큐 파티
5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봄꽃이 하나 둘 떨어지고, 나무의 잎사귀가 커지면서 초록빛이 깊어지고 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녹색이라, 모처럼 휴대폰 화면에 지친 눈을 쉰다. '초록의 나라' 아일랜드의 보석 같은 계절, 여름의 시작.
어제는 길을 걷는데 올해 처음으로 '더위'가 느껴졌다. 입고 있던 후드점퍼를 벗어 허리참에 묶고 있다가 곁을 지나가던 여자가 "오늘 기온이 15도래!"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 휴대폰의 날씨 앱을 열어 보니 '더블린 16도'라고 알려준다. 흥분을 참지 못하고 얼른 사진으로 저장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국은 벌써 섭씨 20도를 웃돈 지 한참 되었다는데, 여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낮 기온이 10도 근처를 맴돌았다. 그러니 16도는 분명 기록적이다.
때마침 금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더블린의 거리는 불금의 설렘으로 서서히 달아올랐다. 이날을 기다려 왔다는 듯 민소매 차림의 여자들이 거리를 활보했고, 햇살이 닿는 야외테라스마다 들뜬 웃음소리와 반짝이는 술잔들이 부서져 내렸다.
다음날인 토요일도 화창한 날씨가 계속됐다.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 우리는 킬라이니 해변과 도키하버의 절경을 감상하며 던리어리까지 차를 몰았다. 요가를 하고 한결 때만난 아이스크림 미니트럭들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원이나 항구로 달려 터줏대감 '테디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유난히 긴 줄이 늘어섰다. 아이도 어른도 막대 초콜렛이 꽂힌 회오리 모양의 아이스크림 '99콘'을 하나씩 손에 쥐고 등대까지 이어지는 긴 부두를 걸었다.
더블리너들이 가장 사랑하는 킬라이니 해변은 이미 휴가철 분위기였다. 개와 아이들이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10대 여자아이들은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간간히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물론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눈앞에 펼쳐진 여름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다음날인 일요일도 화창했다. 아침 6시에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 눈부셔 잠이 깼을 정도다. '지난 이틀 날씨가 좋았으니 오늘쯤 비가 오겠지' 했던 예상이 기분좋게 깨졌고, 우리는 계획대로 오후에 스티브와 루이즈의 집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기로 했다. 2년반 전 첫아이 스캇이 태어나면서 두 사람을 자주 못보고 지냈는데, 얼마전 건강한 둘째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갓난쟁이 얼굴도 볼 겸 핑계김에 한번 뭉치자고 공모한 자리였다. 스티브는 존의 베프이자 브레이 동네주민인데, 마음이 따뜻하고 진실해 내가 개인적으로 존의 친구들 중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스티브의 아내 루이즈도 내가 못지않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쁘고 똑똑한데다, 털털하고 다정하기까지 하다. 루이즈는 존이 쉐프, 스티브가 매니저로 함께 일했던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알바하던 대학생이었는데 스티브와 눈이 맞아 불타는 연애 끝에 결혼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 존과 셋이 한 집에서 살기도 했었단다. 스티브와 루이즈는 우리가 3년 전 아일랜드 관공서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릴 때 우리 결혼의 증인이자 유일한 하객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와 존에게는 더욱 특별하고 고마운 부부다.
오후 4시쯤 차가운 코로나 한팩과 레몬, 후식으로 함께 먹을 애플파이와 바닐라 아이스크림, 둘째의 탄생을 축하하는 초콜렛과 카드를 챙겨들고 스티브의 집을 찾았다. 스티브가 먼저 빅허그로 우릴 맞았고, 아빠를 따라나온 스캇이 수줍게 '하이!' 하고 인사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요리를 하고 있던 루이즈가 베이비슬링을 매고 나와 볼키스로 반겨주었다. 키아란과의 첫만남. 안녕, 키아란! 아직 핏줄도 가시지 않은 여린 피부, 투명한 바다빛 눈동자의 갓난아기가 슬링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루이즈도 슬링 속의 아기도 아주 건강해 보였다.
뒷마당 테라스에서는 바베큐 준비가 한창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한병씩 옆에 놓고 존과 스티브는 능숙한 솜씨로 소시지와 스테이크, 감자를 구웠고, 나는 정원에서 스캇이 뿜어내는 비누방울들이 햇빛 속에서 수정구슬처럼 반짝이며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참, 우리 부탁 들어줘 고마워, 마야!" 스티브가 말했고, 난 "오히려 우리한테 영광이니 고맙다"고 답했다. 스티브가 우리 부부를 집에 초대한 또 하나의 이유. 우리가 그의 부탁에 '예스'로 답한 것을 함께 축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스티브가 존에게 전화해 "할 얘기가 있으니 따로 한번 만나자"고 했다. 며칠 후 브레이의 한 펍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스티브가 한 얘기는 "너랑 마야가 우리 애들 갓페런츠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마야랑 같이 얘기해 보고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갓페런츠(God Parents)'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의 전통 중 하나로, 평소 부모의 역할을 돕고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정신적, 영적 부모로서 아이를 지원해주는 역할을 한다. 보통 부모의 친한 친구나 친지 중 '갓파더'나 '갓마더'가 되고, 우리처럼 부부인 경우는 '갓페런츠'로 함께한다. 처음 존에게 그 제안을 전해듣고 솔직히 난 좀 망설여졌다. 내가 잘 모르는 종교적 전통이 낯설기도 하고, 내 아이도 없이 누군가의 부모란 타이틀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법적인 강제성이 있는 건 아니라지만 혹시 스티브와 루이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어떤 역할까지 해야 하는 건지, 우리가 책임지고 감당할 마음이 있는 건지... 하지만 고민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우리가 결혼식 증인을 부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수락하고 축복해준 두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었고, 우리를 그만큼 진실하게 믿어주는 그들의 마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는 6월 26일, 아일랜드의 한 교회에서 스캇과 키아란의 유아세례식이 있는 날, 우리는 두 남자아이의 '갓 페런츠'가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아이가 없기 때문에 가끔 느끼게 되는 가벼운 결핍, 혹은 위축감을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위로해주시는지도 모르겠다.
루이즈가 만든 샐러드와 리조또가 상에 오르고 고기와 감자도 알맞게 익었을 때, 우리는 모두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았다. 일요일 늦은 오후의 여유로운 햇살이 길게 식탁 위로 내렸고, 내 접시 위에는 신선한 아보카도 샐러드와 포슬포슬 분 나는 아이리쉬감자가 먹음직스레 놓였다.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대화, 무엇보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박한 저녁식사가 이렇게 따뜻한 것인 줄 전에도 알았던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