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네 아이스크림 가게

창을 통해 세상을 구경하다

by Maya Lee

혼자 있는 시간은 팝업창 같은 세상의 순간들을 관찰하기 좋은 시간이다. 짧은 단편영화 한편을 감상하듯, 난 내가 앉아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의 한편에, 혹은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길 위의 풍경에 영화필름처럼 네모난 프레임을 걸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곤 한다. 무작위로 내 프레임 안에 걸려든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거나, 혹은 소리 없는 표정과 몸짓에서 그들의 마음이나 상황, 삶속을 흐르고 있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어제 낮, 난 평소 자주 가는 채식레스토랑 '코누코피아(Cornucopia)'의 2층 창가자리에서 따뜻한 토마토렌틸콩 스프와 아삭한 브로콜리 샐러드를 먹고 있었다. 점심메뉴가 개시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음식은 더없이 신선하고 자리도 여유가 있었다. 18세기 조지안 빌딩을 리모델링한 실내는 모던하게 바뀌었지만 거리를 향해 난 2층의 커다란 창은 여전히 조지안 양식의 흰 나무창틀을 달고 있어, 그 창문으로 거리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운치있게 느껴진다.
나는 혼자의 점심을 즐기며 그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 세상을 구경했다. 창틀의 네모난 프레임 안으로 레스토랑 맞은편 1층 건물에 있는 '머피네 아이스크림'(Murphy's Icecream) 가게가 들어왔다. 난 하늘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가 전부인 머피네 간판이 참 좋다. 아일랜드에서 생산되는 천연원료만 사용해 만드는 그네의 아이스크림 맛처럼 가식도 없고 과장도 없다. 가격이 좀 쎄긴 하지만, 일단 먹어보고 품질의 정직성을 인정하게 되면 꽁한 마음 없이 값을 지불하게 되는 곳이다. 이탈리안 젤라또가 대세인 아일랜드에서 유일하게 아이리쉬스러움을 고집하는 점도 맘에 들고, 더블린으로 진출해 매장도 늘리고 고급아이스크림 제조업자로 제법 이름을 알린 후에도 본산지인 딩글(Dingle)에서 핸드메이드로 제조해 판매하는 작은공장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점도 맘에 든다.

결혼하기 전 혼자 아일랜드 전국을 여행할 때, 캐리 카운티(Co. Kerry)의 작은 타운 딩글에 갔었다. 아담한 항구를 중앙에 품고 뒷편으로는 푸른 산을 두르고 있는 아담한 타운이었는데, 언덕을 타고 오르는 작은 골목들과 곳곳에 숨어 있는 예쁜 카페들, 파스텔톤으로 조르르 어깨를 맞댄 낮은 집들이 이름처럼 '딩글딩글' 소리라도 낼 것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한 작은 골목길에 숨은 듯 '머피네 아이스크림' 본점이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아침으로 먹을 정도로 좋아하던 딩글 출신의 머피 형제가 '머피네 아이스크림'이란 이름으로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을 팔기 시작한 첫 번째 가게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가게가 성공해 분점을 내고 나면 '본점'을 번듯하게 리노베이션하는 게 순서지만, 그곳은 여전히 작은 몸집으로 오래된 건물 한켠을 품고 앉아 처음 때의 열정과 따스함으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종류도, 아이리쉬 씨솔트, 브라운브레드, 아이리쉬 위스키, 딩글 진, 허니콤브 등 아일랜드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료로 만든 것들이 많았다. 내가 주문한 민트 아이스크림에는 잘게 다진 생민트잎이 송송이 박혀 있었다. 난 그 은은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맛에 단번에 반하고 말았다.

코누코피아의 2층 창문 너머 바라본 머피네 아이스크림 앞은 꽤 분주했다. 가게가 있는 위클로 스트릿이 원래 교통인구가 많은데 좋은 날씨까지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가게 앞에는 '아이리쉬 시골농부' 컨셉의 유니폼을 입은 머피네 직원이 둥근 쟁반을 들고 시식용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직 10대로 보이는 어린 여직원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조금 수줍은 동작으로 시식을 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멈춰서서 한입 크기의 아이스크림이 담긴 작은 플라스틱컵을 하나씩 들고 갔다. 가끔 바쁜 걸음으로 그녀가 내미는 아이스크림을 무시하고 지나가거나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아예 못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살짝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공짜 아이스크림을 발견하고 가장 행복해하는 건 관광객들이다. 한 노년의 커플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와 그 자리에서 맛을 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아이리쉬 위스키 아이스크림에 진짜 위스키가 들어 있는지 따위일 수도 있고, 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특별한 아이스크림의 맛에 대한 칭찬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두 사람이 떠난 후 여직원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걸 보니, 두 사람이 그녀에게 어떤 마음의 온기를 남기고 간 모양이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대여섯 명 되는 라틴계 관광객 그룹이 그녀를 지나쳐 우루루 매장으로 들어가더니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나왔다. 머피네의 명성을 듣고 일부러 찾아왔나 보다. 무리가 사라지고 가게 앞이 한산해졌다. 그때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혼자 가게 안으로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오더니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만 클로즈업, 아이스크림 들고 귀요미 표정 짓기...(분명 한국인!) 그 모습을 발견한 여직원이 그 여학생에게 다가가 자기가 찍어주겠다고 하니, 여학생이 고마워하며 몇 가지 귀요미 버전을 더 연출했다. 입을 예쁘게 벌려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무는 닭살연기를 훔쳐보다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저런 장면이 눈에 익숙하던 때가 있었는데, 내가 한국을 오래 떠나 지내긴 한 모양이다.

한국 여학생이 떠나고, 머피네 직원은 아이스크림이 담긴 작은 컵들을 쟁반에 들고 나와 가게 문 앞에 섰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함께 서 있었다. 밝은 얼굴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니 꽤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유니폼을 입지 않은 걸 보니 직원은 아닐 테고, 알바하는 친구 응원이라도 하러 온 걸까. 가득 찼던 쟁반 위에 컵이 달랑 3개 남았을 때 머피네 직원이 친구에게 컵을 하나 건넸다. 한입에 홀랑 털어넣는 친구를 보더니 얼른 하나를 더 건넨다. 친구가 웃으며 받아들었다. 직원은 슬쩍 하나 남은 컵을 바라보다가 얼른 친구의 남은 손에 하나 남은 컵을 쥐어주고는 매장 안으로 사라졌다. 친구를 챙겨주려는 어린 직원의 마음이 너무 예뻐, 난 그저 매니저가 눈치 못챘거나 봤더라도 모른 척 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모난 프레임 안으로 흘러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을 지켜보고 있는 나도 어쩌면 누군가의 프레임 안에서 관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때 누군가에게 미소를 주는 친절이 들키고, 무언가에 몰두하는 열정이 들켰으면 좋겠다는. 조만간 볕이 기분좋게 따스하고 바람이 다정한 날, 머피네 아이스크림 가게로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야겠다.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름이 노크하던, 어느 주말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