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Retirement!

춤과 노래, 축하와 웃음의 아이리쉬 은퇴식

by Maya Lee

지난 5월 초, 존과 함께 부터스타운의 한 펍에서 열린 은퇴기념파티에 갔었다. 존이 일하는 블랙락컬리지에서 수십년간 일해온 세 사람이 정년을 맞아, 직장 차원에서 열어주는 파티였다. 마침 존이 그 파티에서 밴드공연을 하게 되어 나도 존의 공연을 응원할 차 따라간 것이다.
파티의 공식적인 시작 시간은 저녁 9시지만 우리는 공연준비를 위해 7시반쯤 도착했다. 존과 함께 기타연주와 노래를 할 짝꿍 제임스도 우리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파티를 위해 대여한 펍 2층으로 올라가니 벌써 몇몇 사람들이 도착해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오늘 주인공의 가족이나 지인들인 듯했다. 존과 제임스가 무대와 사운드를 점검하는 동안 나는 빈 테이블에 앉아 곧 파티가 시작될 공간을 둘러보았다. 낡은 벽난로와 책꽂이, 오래 된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는 장식장을 보니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테이블마다 'Congratulations' 글씨가 박힌 색색의 풍선과 꽃장식이 놓여 있고, 천장에는 'Happy Retirement!'라는 문구가 반복해서 프린트된 리본이 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나에겐 은퇴를 이렇게 생일처럼 축하하는 아일랜드 문화가 신기하고 낯설었다.

내가 한국에서 습득한 '은퇴'의 이미지는 뭔가 엄숙하고 진지하며, 일을 그만둔 후 생활에 대한 기대보다는 불안과 걱정이 있고, '제2의 인생'이란 말도 즐겁고 신나기보다는 어쩐지 무슨 일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외부의 분위기 때문에 정해진 정년보다 빨리 일을 그만두게 되는 한국의 현실에서, 아이리쉬들이 정년까지 안정감 있게 일하고 순리에 따라 은퇴를 할 때 느끼는 성취감과 안도감, 여유로운 노년에 대한 기대를 갖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잠시 후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제리와 베니가 똑같은 수트를 빼입고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와르르 축하의 박수로 환영하자, 두 사람이 연예인처럼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얼굴 가득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얼굴도 많이 닮은 데다 둘다 머리가 '빛나는 전구'라 쌍둥이 같다 했더니, 존이 "둘이 친형제"라고 알려준다.
"두 사람이 블랙락컬리지에서 일한 세월이 얼만지 알아? 자그마치 40년이래! 시골에서 어렵게 자라다 이십대 청년시절에 은퇴신부들을 보좌하고 숙소를 관리하는 일을 시작해 이곳에서 신부들과 먹고 자고... 그렇게 65세가 된 거야. 난 절대 그렇게 못하지만, 아니 안하지만 진심으로 존경해, 저 두 사람."
존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을 다시 바라보았다. 2년반이 최장 회사생활이었던 난 그들이 블랙락컬리지에서 보낸 40년의 세월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한곳에 적을 두지 못하고 늘 떠남과 변화를 꿈꾸었던 내가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만족과 행복의 미소를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그들의 선택이 아무리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겸손과 성실, 묵묵한 인내가 없었다면 결코 버텨낼 수 없었으리라는...

어느새 파티장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테이블이 모자라 서 있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날 파티의 세 번째 주인공인 마리도 보였다. 제리와 베니만큼 긴 세월은 아니지만 마리 역시 20년 넘게 블랙락컬리지에서 건물 미화작업과 샌드위치나 샐러드 등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델리파트 일을 하고 있었다. 마리와는 2년 전 한국에서 함께 맥주를 마신 특별한 인연이 있다. 마리는 파일럿인 사위가 아시아나항공에서 일할 때 딸과 갓난쟁이 손주를 보러 매년 서울을 오가곤 했는데, 마침 그해 존과 내가 한국을 방문하려던 시기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존과 마리는 뜻밖의 우연을 재밌어하며 한국에서 꼭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약속장소인 이태원 <게코>에서 마주하던 순간 신기하고 반가워하던 존과 마리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머나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직장동료를 만나게 되다니, 그동안 별로 친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친밀감은 급상승하고, 그들이 경험한 서울과 한국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빈 맥주잔이 빠르게 쌓여갔다.
그 이후로 따라 만난 적이 없어 궁금했는데, 그녀의 은퇴식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리는 6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젊고 활기찼다. 난, 봄날에 어울리는 화사한 드레스에 꽃다발을 가득 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축하를 건넸다. "마리! 반가워요, 그리고 진심으로 축하해요! 기분이 어때요?" 무심코 던진 질문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일하다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니 좀 이상하긴 한데, 솔직히 내 은퇴생활이 아주 기대돼."
그녀를 다른 축하객들에게 양보하고 내 자리로 돌아온 후에도 그녀가 '은퇴생활이 기대된다'고 한 말이 한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갑자기 늘어난 자유시간을 어쩌지 못해 종일 집안을 서성이던 아빠. 매일저녁 술에 취해 회사 욕을 하던 아빠.
아빠는 97년 IMF가 우리나라 경제를 뒤흔들었을 때 그 여파로 오래 몸담았단 직장을 나와야 했다. 권고사직을 받아들이며 적절한 보상을 받긴 했지만 회사에 대한 배신감으로 생긴 아빠의 분노와 상처는 오래도록 회복되지 않았다. 겨우 50대였으니 은퇴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지만, 퇴직 이후 찾아온 무력감과 알콜의존증 때문에 결국 그때의 퇴직은 아빠의 은퇴가 되고 말았다. 당시 전체적으로 우울했던 사회분위기 탓일 수도 있지만, 난 일과 직장에서 자유로워진 아빠를 축하해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하셨으니 이젠 마음껏 즐기시라고 격려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집안 가득 풍선을 매달고 파티를 열어드리고 싶지만 이제 세상에 안계신 것을.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가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무대로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이어받아 사회자가 파티의 주인공인 세 사람을 무대로 불러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헌신적으로 일한 세 사람의 노고를 치하하고 은퇴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한 사람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축하객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존경의 박수를 보냈고, 가까운 지인들은 앞으로 나와 키스와 허그를 나누었다.

제리는 은퇴 소감문을 읽다가 그만 목이 메어 미처 끝내지 못했고, 취기가 오른 베니는 무대로 나와 제법 노련한 솜씨로 신나게 춤을 췄다. 커다란 꽃다발이 마리의 품에 안겼고, 세 사람은 여러 축하객 무리와 번갈아가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존과 제임스의 연주가 이어지며 파티 분위기는 점점 더 무르익어갔다. 나는 그 떠들석함에 묻힌 채 벽에 걸린 스크린을 바라봤다. 그 위로 그들이 블랙락컬리지에서 일하며 사진으로 남긴 수십 년의 흔적이 흑백영화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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