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스위스 여행 1 - Geneva
엄마와의 스위스 여행 둘째날, 우리는 제네바에 있었다. 구시가지에 밀집해 있는 크고 작은 박물관들과 대성당을 둘러본 뒤 점심을 먹기 위해 성당 근처 작은 플라자의 모퉁이 벤치에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엄마는 베낭에서 전날 저녁 식당에서 먹다남은 닭고기 두 조각과 빵을 꺼냈다. "난 이거면 충분하니 너 먹을 것만 사라"는 엄마 고집에, 난 근처 델리에서 야채만 담은 샐러드를 좀 사왔다. 엄마는 원래 쌀 한톨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난 그런 엄마의 알뜰함을 존경한다. 엄마의 절약정신 덕분에 아빠 월급만으로도 삼남매가 부족하지 않게 컸고, 이렇게 엄마의 소원이었던 스위스 여행까지 오게 됐으니까. 나도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 음식을 잘 못 버린다. 외식을 할 때 음식이 남으면 되도록 집에 싸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엄마는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아까워서 다 먹고, 난 맛없는 음식은 먹을 만큼 먹고 남긴다는 것.
"엄마, 제 샐러드도 같이 드세요. 그것만으로 양이 되겠어요? 그리고 어제 닭이 맵고 짜다고 했잖아. 여기 생야채랑 같이 먹으면 한결 나을텐데.."
하지만 엄마는 "됐다, 너나 먹으렴. 난 이것만 먹을란다."라며 내 말을 일갈했다. 그리고는 바른 자세로 등을 곧추세우고 차게 식은 닭고기와 딱딱하게 굳은 빵을 손으로 조금씩 떼어먹기 시작했다. 아무도 못말리는 고집이라는 걸 알기에,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늘 이런 식이다. 자식에겐 좋은 쪽을 주고 자신은 나머지를 선택한다. 자식에게 더 많이 주고 자신은 늘 모자라게 가져간다. 그런데 나에게는 '희생'에 대한 엄마의 단호함이 답답한 벽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 마음을 고마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짜증이 난다. 몇 젓가락 가져가 맛이라도 보시면 어디 덧나나. 나는 졸지에 늙은 모친 남은 밥 주고 나만 새 밥 먹는 못된 딸이 된 기분이었다. 양상추를 한입 가득 넣고 와작와작 씹었다. 난 엄마랑 좀더 편안하게 좋은 것도 나누고 나쁜 것도 나누는 관계,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어느 쪽도 '희생'하지 않고 함께 누릴 수 있는 관계이고 싶은데.
엄마도 내가 말수가 적어지고 뚱해진 것을 눈치챘는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드셨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의 점심 피크닉. 결국 엄마는 내 샐러드에는 손도 대지 않으셨다. 먹는 동안 샐러드 박스만 쳐다보고 있다가 비우고 나서야 시선을 드니,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과 주변의 아기자기한 오브제들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 옆의 작은 분수, 이끼 낀 담벼락, 그 담벼락을 타고 넘어온 아름드리 나무,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푸른빛 호수...
제네바에 도착한 첫날은 조금 실망했던 것도 같다. 탁 트인 제네바호의 경관과 하늘로 치솟는 제도분수의 물줄기,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미끈한 빌딩들이 멋있었지만, 쉴 새 없이 지나가는 트램과 버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탁한 공기가 여느 대도시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날 가본 구시가지(올드타운)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특색 있는 박물관과 갤러리, 상점들이 밀집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주었다. 무엇보다 수세기 전 언덕배기에 지어진 프랑스풍 건물들 사이로, 좁고 오래된 돌길을 걷는 것이 좋았다. 오르막과 내리막, 펼쳐진 공간과 가려진 공간이 뒤섞인 이런 오랜 길 위에서는 목적지를 지나치게 갈망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길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배짱이 있어야 여정을 즐길 수 있다. 어떤 곳을 향해 한참 갔는데 도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될 때 찾고 있던 장소가 깜짝선물처럼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툴두툴한 돌길을 걸으며 상한 마음을 길 위에 떨궈놓으려 애썼다. 어쩌면 엄마한테 짜증난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돈도 잘 벌고 여유 있게 사는 딸이었다면 내 돈으로 엄마 여행도 시켜드리고 따뜻한 음식도 사드렸을 텐데, 그럼 엄마가 지금처럼 강박적으로 아끼지 않고 여행하실 수 있었을 텐데. 내가 그랬다. 평생에 한번은 자유여행 해보셔야 한다고 바람을 넣었다. 그리고는 가이드를 자처해 여행을 따라와서는 이렇게 엄마 돈을 축내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는지도. 발바닥과 샌들 밑창 사이로 굴러들어온 작은 모래 알갱이 몇 개가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날씨는 눈부시게 화창했다. 피부에 내려앉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 한국에 살 땐 25도 정도의 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아일랜드의 서늘함에 익숙해진 나에겐 조금 낯설고 벅찼다. 우리는 호숫가를 따라 호텔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한국에서 아일랜드까지의 장시간 비행에, 며칠 간에 시작한 스위스여행의 뚜벅이 일정까지 소화하느라 엄마는 많이 피곤하신 듯했다. 그날 암마는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제네바의 여름해는 아직 하늘 높이 걸려 있었다. 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빛이 조금 더 사위어들길 기다리며 엄마가 한국에서 가져다주신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엄마의 코고는 소리가 낮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득 엄마와 함께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자는 게 어릴 때 이후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70세가 된 엄마를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엄마와 떨어져 산 세월 동안 엄마는 엄마의 환경에 맞춰, 나는 내 환경에 맞춰 적응하며 변해왔을 것이다. 앞으로 스위스에서 엄마와 함께 할 3주는 그 간격을 발견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될 것이다. 앞으로 엄마한테 좀더 다정해져야겠다 마음 먹는다. 엄마와 단둘이 이렇게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할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