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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l 06. 2016

에프엠 엄마와 아웃사이더 딸의 균형잡기

엄마와 함께 스위스여행2 - Lausanne

"잘 잤니?"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걸까.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눈을 떠보니 엄마가 벌써 깨어 책상 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운 걸로 보아, 엄마도 어제 내가 다짐한 것처럼 나에게 좀더 다정해지기로 맘 먹으셨나 보다. 나도 한껏 살가운 목소리로 '네, 아주 푹 잤어요. 엄마는요?" 하고 물었고, 그렇게 오고간 아침인사로 일단 어제 점심시간 이후 내내 묵직했던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한껏 발랄해졌다.

제네바를 떠나 로잔으로 출발한 기차는 50분 내내 제네바호를 끼고 동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스위스열차답게 정해진 시각에 정확하게 우리를 로잔역에 내려주었다. 이번 여행 중 묵을 숙소들은 엄마의 이동편의를 고려해 모두 기차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예약해 두었는데, 로잔에서 우리가 묵을 빅토리아호텔도 로잔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다.
엄마와 나는 호텔에 짐을 풀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인 줄 알았던 로잔은 생각보다 크고 복잡했다. 알고 보니 스위스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제네바호 가로 지름의 중간쯤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제네바호 주변 마을을 잇는 수상택시와 크루즈의 주요정거장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라보포도밭, 시옹성을 여행하기에도 좋은 거점이다.

로잔도 현대적인 건물과 넓은 도로가 뻗어 있는 호수 주변과 중세시대의 건물들과 거리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구시가지로 나뉜다. 물론 더 재미가 있는 쪽은 구시가지다. 가파른 언덕배기에 형성된 구시가지까지 이어진 끝없는 계단을 보는 순간 '헉' 소리가 났지만, 중간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지하도로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다리는 아직 뚜벅이여행을 감당할 만큼 젊지만 엄마는 더 이상 아니라는 걸, 요 며칠 붙어다니며 깨닫는 중이었다. 늘 나보다 앞서가던 엄마가 자꾸 내 뒤로 처지고,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만 해도 나보다 더 산을 잘 오르셨는데 이젠 자주 멈춰서서 숨을 고르신다. 그러면서도 엄마 짐을 들어드리거나 나눠지겠다고 할 때마다 끝까지 싫다고 하는 고집은 왜 시들 생각을 않는 건지.
엄마는 평생 공부와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래서 처녀 때와 큰 차이 없는 몸매와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며 항상 부지런히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원칙에 충실한 사람. 그런 엄마를 나는 딸로서 답답하고 힘들어 했고, 나와 다른 한 인간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있는 엄마는 또 다른 존재로 보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딛고 노년의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70세의 여자가 '버킷리스트'였던 스위스여행을 하며 느낄 복잡다단한 층위의 감정들을 나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시가지의 중심에서 미로처럼 뻗어나간 작은 길들을 걸으며 나는 걷는 속도를 엄마와 맞추려 애썼다. 난 흥미로운 작은 가게나 갤러리가 보이면 들어가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때마다 엄마가 문밖에 서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냥 쇼윈도우로 잠깐씩 엿보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계속 되새겼다. 이건 엄마를 위한 여행이야. 엄마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여행이야...라고.

다행히 엄마도 장 구경은 좋다 하셔서 다음날 일정은 구시가지에서 열리는 금요장 구경으로 시작했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는 파머스마켓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주로 주말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마을센터를 중심으로 그 지역에서 생산된 싱싱한 야채와 과일, 수공업으로 생산한 치즈, 소세지, 빵, 오일, 잼 등을 맛보거나 살 수 있는 작은 천막가게들이 길게 늘어선다. 수퍼마켓이 아닌 그런 지역장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기와 수선스러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의 부분이기도 하다. 엄마와 나는 체리와 사과 조금, 무게로 달아파는 호밀빵 4분의1 조각, 양파와 파프리카를 올리브오일에 재어 병에 담은 수제스프레드를 샀다. 물론 나는 중간중간 열심히 시식용 치즈와 과일을 집어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에서 산 빵과 과일로 점심을 간단하게 때운 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아르브뤼 미술관(Musee de l'Art Brut)으로 갔다. 살아생전 우리 사회에서 소위 '예술가'로서 교육 받은 적도 인정받은 적도 없으나 그들의 삶으로 진정한 '예술'을 했던 사람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나에게는 작품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워서라기보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철저히 자아의 깊은 곳에서 건저올린 고뇌와 욕망의 절절함이 전해주는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품 옆에 붙어 있는 작가의 사진과 작품 배경을 읽지 않고 대충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작가 대부분이 정신질환을 앓았거나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었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도 많았다. 또 생후에야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발견한 경우도 많았다. 내가 사회의 아웃사이더라고 느꼈던 어떤 균열과 아픔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그들만큼 철저히 고립되거나 소외된 적은 없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맞닿아 있는 듯 느껴졌다.
내가 그 안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나 보다. 엄마는 벌써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 밖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다. "뭘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 봐? 대충 둘러보고 오지. 확실히 수준이 좀 차이난다, 얘." 그러고 보니 로잔 현대미술관에서 모네와 피카소, 달리, 마티스의 작품들 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엄마가 이곳에서는 조용하셨다. 늘 사회의 중심에서 사회적 표준에 맞춰 살아오신 엄마와 그녀의 딸인 나는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

저녁을 먹고 언덕 꼭대기에 있는 고딕 대성당에 올라 로잔 시내를 바라보았다. 중세도시의 상징인 붉은색 지붕들이 모자이크처럼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풍성한 구름과 파란 하늘도, 그와 맞닿은 호수도, 모두 그림처럼 예뻤다.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엄마의 옆 얼굴을 슬쩍 훔쳐봤다. 행복해 보였다. 삐뚤빼뚤한 딸 때문에 속상하실 부분을 제하고도 즐거움이 남으니 참 다행이다,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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