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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l 11. 2016

그녀가 꿈꿨던 어떤 풍경

엄마와 함께 스위스여행3 - Montreux

이번 스위스여행 전 스위스에서는 독어권인 바젤, 쮜리히만 여행해본 나는 스위스가 독어, 프랑스어, 이태리어의 3개 국어를 쓴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독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몇몇 지역에서만 프랑스어나 이태리어를 병용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이번에 스위스 안에 세 개의 다른 언어와 문화권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여행의 출발지였던 제네바를 비롯해 프랑스와 가까운 제네바호 주변의 도시들은 프랑스어권이다. 거리의 간판들도, 레스토랑의 메뉴판도, 사람들이 주고받는 언어도 모두 프랑스어. 로잔에서 제네바호를 따라 동쪽으로 25쯤 기차를 타고 가면 닿는 '몽트뢰', 이름부터 매우 프랑스스러운 이곳이 엄마와 내가 머물 세 번째 도시였다.

"어머나 세상에! 저 풍경 좀 봐라. 이제야 내가 생각했던 스위스에 온 것 같아!"
몽트뢰 기차역을 나오자마자 엄마가 아이처럼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기를 꺼내 바쁘게 셔터를 눌러대는 엄마. 칠순을 넘어선 엄마는 다시 소녀로 회귀 중이다.
초록빛 물색의 드넓은 호수, 호수의 뒷편으로 병풍처럼 드리운 푸른 산들, 그 산들이 지붕처럼 이고 있는 만년설이 맑은 하늘 아래 커다란 화폭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과 자연의 형태와 색깔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다.
몽트뢰는 작은 규모에 비해 관광지로 꽤 알려진 곳이다. 무엇보다 시옹까지 이어진 꽃길을 따라 걸으며 웅장한 만년설을 배경으로 펼쳐진 제네바호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매년 7월초 열리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로도 유명하다. 이 작은 도시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재즈 페스티벌이라니, 음악적 기질이 강한 도시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그 기간에 맞춰 오고 싶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일정이 나오지 않는데다, 엄마한테 슬쩍 운을 띄웠을 때 "근데 페스티벌 하면 사람 바글바글한 거 아니니? 복잡한 건 별룬데"라는 엄마의 반응에 마음을 접었더랬다. 그래도 막상 곳곳에 재즈 페스티벌을 홍보하는 포스터와 플래카드가 걸린 것을 보니 다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몽트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뿐이라 우리는 호텔 체크인을 하자마자 다시 호숫가로 나와 시옹으로 가는 페리를 탔다. 물 위에 지어졌다는 시옹성을 보기 위해서다. 페리는 얼마 걸리지 않아 우리를 바로 시옹성 옆에 있는 선착장에 내려주었다. 시옹성을 보러온 사람들의 긴 행렬에 합류해 1시간반 남짓 시옹성 내부를 둘러보았다. 시옹성은 영국작가 바이런의 <시옹성의 죄수>란 시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그 시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보니바르가 묶여 있었던 지하감옥의 기둥에는 바이런이 새긴 보니바르의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보니바르가 당시 성의 군주였던 사보이 왕가에 밉보여 6년 동안 사상범으로 갇혀 있었던 동굴 속. 그의 이름이 새겨진 기둥 옆에 서서 천장 틈새로 들어오는 여린 빛을 보았다. 호수가 낮동안 품고 있다 나눠주었던 그 희미한 빛줄기가 그와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베른인이 시옹성을 점령하며 풀려난 그가 동굴 밖으로 처음 나와 바라보았을 제네바호의 물빛과 하늘빛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문득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가 너무 넘쳐 그 소중함에 무뎌지고 있는 나를 보았다. 감사를 잃는 순간 즐거움도 잃는다는 걸 잊지 말기로.

다시 페리를 타고 몽트뢰로 돌아와 호텔에서 잠시 지친 다리를 쉬었다. 호텔 근처에서 발견한 터키식 뷔페식당에서 오랜만에 밥과 익은 야채, 국물 자작한 스튜로 개운한 식사를 하고, 프레디 머큐리를 형상화한 동상과 조형물을 지나 산책길을 걸었다. 엄마는 길 양쪽으로 가로수처럼 이어지는 화려한 꽃들의 향연에 넋을 놓았고 난 많은 시인과 음악인들이 사랑에 빠졌던 도시의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세포구멍들을 활짝 열고 느리게 걸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색과 형태, 몸에 닿는 온도와 습기, 머리에 떠오르는 어떤 기억들까지 잡아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몽트뢰의 꽃길도 그랬다. 엄마와 유난히 사이좋게 걸은 길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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