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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l 18. 2016

융프라우 곁에서 하이디처럼

엄마와 함께 스위스여행4 - 알프스 융프라우

이번 스위스여행의 일정과 경로를 정하며 가장 고민스러웠던 곳이 융프라우 지역이었다. 융프라우에 오르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번 여행의 가장 핵심이었는데, 어디에서 자고 어디로 이동해야 융프라우를 가장 잘 경험했다 할 수 있을지 감이 안왔다. 일단 가이드북에 소개된 융프라우 지역의 마을 중 중 가장 마음이 가는 두 곳을 골라 하룻밤씩 나누어 자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온 곳이 그린델발트(Grindelwald)와 벵겐(Wengen). 설산을 바라보며 산장 분위기 물씬 나는 스위스 전통가옥 '샬레'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렜다.


몽트뢰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로잔을 거쳐 중세시대 분위기가 물씬 나는 베른에서 이틀을 묵은 후 향한 곳은 인터라켄. 인터라켄은 융프라우에 오르는 모든 사람의 베이스기지 역할을 하는 교통의 요지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또 한 번은 도시 전체가 호텔과 음식점, 기념품샵으로 채워진 하나의 커다란 리조트 같아서였다. 인터라켄에서 하룻밤만 묵기로 한 건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도착한 순간부터 엄마도 나도 빨리 시끌벅적한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쉬니게플라테로 가는 산악열차를 탔다. 시내로 돌아오는 마지막 열차를 타려면 시간이 조금 촉박했지만, 남은 오후를 인터라켄 시내에서 하릴없이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빠알간 옷을 입은 산악열차는 산등성이 경사를 따라 몸을 잔뜩 젖힌 채 힘주어 발을 굴렀다. 털털털털... 고도가 높아지면서 지상에서 볼 땐 손톱만 하던 설산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구름 한점 없이 파란 하늘. 그 아래로 펼쳐지는 이름 모를 들꽃들의 화려한 퍼레이드. 그 모든 풍경을 그대로 담아내기를 욕망하지만 그럴 수 없는 카메라의 셔터소리가 다급한 마음들을 따라 바빠졌다.
쉬니게플라테 정상에서 내려 전망대로 올라가니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세 봉우리가 눈앞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봉우리의 높이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다는데,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삼둥이처럼 구분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어쨌든 사진으로만 보던 그 융프라우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명료한 여름햇살이 산봉우리를 덮고 있는 흰눈 위로 부서져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스위스에 있다는 사실이 오감으로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그 감각들이 너무나 생생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 아쉬웠지만 하행선 마지막 열차를 놓칠까봐 부랴부랴 인터라켄으로 돌아온 후에야 우리가 쉬니게플라케에서 가장 유명한 들꽃산책로와 들꽃전시관을 못보고 온 것을 알았다. 나도 내심 아쉬웠지만 다음 이틀간 융프라우 지역을 실컷 둘러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금새 괜찮아졌는데 엄마는 아니었다. '들꽃 가득 핀 길을 걸으며 들꽃을 실컷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엄마는 그 길을 놓친 것이 내내 속상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셨다. 나는 내가 그 정보를 미리 알아보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분명 오늘 놓친 꽃들까지 내일 다 보게 될 거야"라는 어줍은 말로 엄마를 위로하다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융프라우 봉우리가 내 눈앞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터지더니 그 안에서 들꽃 무더기가 쏟아져 내리는 꿈을 꿨다.

다음날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그린델발트, 다시 그린델발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산중턱의 작은 마을 보르트(Bort)로 갔다. 곤돌라의 첫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자마자 그림처럼 눈앞에 나타난 스위스 전통양식의 예쁜 샬레! 붉은 제라늄 화분으로 장식된 나무 대문을 삐걱 열고 하이디가 마중 나올 것만 같은 그곳이 바로 우리가 하룻밤 묵어갈 <베르그하우스 보르트> 호텔이었다.
"세상에나 세상이나...이런 풍경이 존재한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하루만 있다 가기는 정말 아까운 곳이구나..."
사실 나도 엄마와 같은 마음이었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아이거의 옆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휴대폰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셔터를 누리긴 했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경이로움의 백만분의 일도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긴 최고급 카메라가 있었던들 가능했을까. 풍경은 어느 정도 비슷하게 담아낼 수 있었을지 몰라도, 산아래 들꽃들의 미려한 색깔과 몸짓, 시야를 장악하고 있는 설산의 장엄함, 산등성이에 쌓인 눈 위에 머물러 반짝이는 여름 햇살과 내 목뒤를 훑고 지나가는 온화하면서도 선듯한 산공기, 내가 머물러 있는 그 순간의 시간과 공간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뿐이었다.

그날 오후 엄마와 나는 보르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피르스트까지 오른 다음 2시간이 넘는 긴 트레킹을 했다. 우리는 길 위에서 따갑도록 강렬한 햇빛과 갑자기 뿌려대는 소나기를 만났고, 이름 모를 들꽃들이 양탄자처럼 펼쳐진 꽃길과 산림이 우거진 숲길을 걷고, 설산이 투명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호수 곁을 지났다. '들꽃 가득한 길을 걷는 것이 소원'이라던 엄마는 처음 보는 들꽃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멈춰서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엄마는 '나이가 들면 꽃들이 예뻐진다'고 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인터라켄으로 내려와 기차를 타고 반대쪽 산등성이로 올랐다. 이번에는 융프라우쪽이 보이는 벵겐(Wengen)이다. 벵겐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융프라우 봉우리와 비슷한 높이의 전망대까지 올랐다. 갑자기 계절이 겨울로 바뀐 듯 차가운 바람이 옷속을 파고 드는 전망대 끝에 서서 융프라우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산등성이에 쌓인 눈이 흩날리며 운무처럼 산주위를 에워쌌다. 엄마와 나도 전망대를 가득 메운 사람들 틈새에서 만난 한국학생에게 부탁해 융프라우를 배경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엄마와 함께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였다. 시간이 오래 흐른 뒤 그 사진을 다시 보면 어떤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어쩌면 이 멋진 융프라우의 위용보다도 엄마와 나 단둘이 그 멀고 높고 낯선 세상의 모퉁이에 함께 서 있었던 순간이 불쑥 먹먹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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