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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Sep 10. 2016

그라나다에서의 첫날

스페인어를 위한 한달의 여정을 시작하다

단순한 관심이나 열정으로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어떤 일을 벌이고 나서, 어느 순간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물론 그 이유와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나에겐 스페인어가 그렇다. 관심은 늘 있었지만 처음 배우기 시작한 건 3년 전쯤이다. 그때 존이랑 나는 긴 남미여행에 대한 꿈을 마치 다음달 떠날 사람들처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것이 스페인어에 대한 갈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한달도 아니고 1년이면 스페인어는 선택이 아닌 필수야."
"그래, 그럼 네가 스페인어를 배워. 나 언어 배우는 데 소질 없는 거 알잖아. 난 대신 버스킹을 해서 돈을 벌게."
존의 말에 혹해 난 어느날 더블린에 있는 스페인어 문화원을 덜컥 등록했다. 생짜 기초반부터 시작했다. 중간에 쉬다 다시 하기를 반복했지만, 이상하게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당장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남미여행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계속 미뤄지고 있었지만 나는 우리가 언젠가 떠나리란 걸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느꼈다. 잠깐 배워본 추억이나 기본회화 문장을 읊을 줄 아는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는 걸, 계속 가고 싶고, 가야만 한다는 걸.

그래서 이곳에 왔다. 스페인의 그라다나. 영어공부하러 영국이나 호주나 미국이 아니라 아일랜드를 선택했던 것처럼,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이 작은 도시로.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안달루시아의 태양만큼 강한 기억의 시간이 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그라나다의 9월 속으로 들어왔다.


하, 덥다. 무지하게 덥다. 더운 바람을 들이마시니 목울대가 턱 막힌다. 휴대폰에 뜬 40도라는 숫자를 믿을 수 없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봤다. 한국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숫자였다. 한국의 9월과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왔는데 착각이었다. 몇 년 전 갔던 그리스 자킨토스와 올해 여름 취리히에서 땀띠 때문에 잠도 못자고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들떴던 마음은 사라지고 한달 동안 어떻게 지내나 하는 걱정이 도둑처럼 들이닥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이곳에서 한달 동안 살아야 한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나에게 호환마마보다 더 두려운 것이 바로 피부알러지. 내 안에는 해외여행 중 급발진 알러지 때문에 5번 이상 병원신세를 져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내재된 공포가 있었기에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공항에서 짐을 찾고 보니 캐리어의 지퍼 부분이 반 이상 열려 있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쳤다. 다행히 없어진 물건이 없는 걸 보니 짐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다 터진 사고인 것 같았다. 여기 가지고 오려고 새로산 캐리어가 이 모양이라니! 뿔딱지가 났다. 가장 걱정되는 건 커버도 씌우지 않고 짐 사이에 넣어온 노트북. 공항으로 마중 나와준 어학원 선생님의 차를 타고 아파트까지 오는 동안에도 노트북 걱정 때문에 안그래도 안들리는 스페인어가 더 안들렸다. 다행히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전원을 켜보니 작동에는 문제가 없는 듯해 겨우 한숨 놓았다. 그러고 보니 집까지 데려다준 선생님 참 친절했는데, 바보같이 내 걱정 때문에 제대로 대화도 못나누고 고맙단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다음주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꼭 고마웠다 말해야지. 일단 잃어버린 물건도 없고 집까지 무사히 도착했으니, 무조건 감사할 일이다.


바로셀로나 에비뉴 28, 7층 B동. 내가 한달 동안 지낼 아파트다. 스페인 남부 건축 스타일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로, 엘리베이터 겉문도 수동으로 열어야 한다. 방이 4개인데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 말고는 마음에 든다. 내 방은 현관 앞에 있는 끝방이다. 화장실이나 거실에서 멀어 불편하고 거실에 있는 무선공유기의 신호가 가물가물하게 잡힌다는 건 단점. 다른 방들보다 넓고 프라이버시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건 장점.
짐을 부려놓고 있는데 집안에서 서성이고 있던 남자애 두 명이 와서 인사를 했다. 한 명의 독일, 다른 한명은 영국에서 왔다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나보다 최소 10년 넘게 어린데다 마르고 예쁘장한 아이돌 스타일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살아보게 생겼다. 이럴 땐 한국처럼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 먹을 수 있는 게,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늙은누이 노릇을 안해도 된다는 게 정말 좋다.
짐도 대충 정리했겠다, 플랫메이트들과 인사도 했겠다,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기에 지도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난 밤에 특히 길눈이 어둡기 때문에 해가 남아 있을 때 동네 구경을 좀 하고 싶었다.
더위가 가신 거리는 산책할 만했다. 새로 산 샌들에 길드느라 까진 발등이 쓰라려 쉬고 싶어질 때쯤, 분위기 괜찮은 레스토랑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밥 삼아 가스파초(차가운 토마토스프)에 맥주 한잔을 곁들여 먹는데, 갑자기 존이 아주 많이 보고싶었다.



집에 돌아오니 아까 못본 여자애 두명이 더 집안에 있었다. 학교 친구들이라 했다. 땀에 절은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나니 온몸이 노곤했다. 전날 글랜한사드 공연을 보고 12시 넘어 집에 온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에 가느라 잠을 제대로 못잔 탓이기도 했다. 일찍 잘 생각으로 막 침대에 누우려는데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일어나 문을 여니 팔랑이는 나시 원피스를 입은 날씬한 여자애가 붉은 액체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아까 인사한 학교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짙게 그린 검정 아이섀도우 안의 검은 눈동자가 이국적이었다.
"이거 마셔 볼래? 스페인 음료순데 와인 같은 맛이야. 우리 지금 발코니에 모여 얘기하고 있는데 와서 같이 마셔도 좋고."
몸은 완전히 녹초였지만 왠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그라나다에 오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혼자 있고 싶더라도 같이 있기 위해 노력할 것'.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고 익숙한 내 자신을 조금 다른 곳에 놓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곳에 있는 동안은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열어 친구가 되는 여행자의 마음이고 싶었다.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고 발코니 모임에 합류했다. 작은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대여섯 명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잔을 부딪쳤다. 스페인어 학교와 선생님, 반 친구들 이야기, 스페인의 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안주 삼아 가난한 학생들답게 싸구려 와인주스를 홀짝이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줄 몰랐다. 어두컴컴한 발코니는 5성급 호텔의 테라스처럼 멋지지 않았지만 창문을 통해 저만큼 바라보이는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올드타운의 야경만큼은 공평하게 아름다웠다. 그제서야 내가 그라나다에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렇게 낡은 그라나다 아파트의 발코니 위에서 첫날밤이 저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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