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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Nov 13. 2016

낯선 이름을 따라 떠난 가을여행- 'Tuam'

진짜 아일랜드를 만나는 우리만의 방법

차를 타고 달리며 생각했다.
올해는 유난히 단풍이 예쁘다고.
아일랜드의 가을은 늘 오는 듯 지나가곤 했는데 이번 가을은 제대로 존재감을 증명하고 있다.하늘은 높고, 나뭇잎들은 가슴 뛰게 붉거나 노랗다.
올 여름과 가을 예년보다 비가 적어 그런가? 그러고 보니 가방 속에 늘 넣고다니는 우산을 펴본 것이 일주일이 넘는 것 같다. 그동안 안온 비가 이번 겨울에 다 올 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이번 겨울의 대부분을 한국과 호주에 있을 예정이니 어쩌면 아일랜드에서 겨울마다 겪는 '윈터블루스'도 올해는 슬쩍 피해가련지도 모른다.

존과 함께 골웨이에 있는 튬(Tuam)이라는 작은 타운을 향해가는 중이었다. 축복 받은 날이었다. 눈시리게 파란 하늘이 아침을 열자, 시리고 투명한 공기와 환한 햇빛이 내려와 땅 위의 존재들을 부드럽게 감쌌다. 오랜만에 몇시까지 준비해야 된다는 명목 없이 게으름을 피워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빨리 길 위에 있고 싶어 몸이 달았기에, 스스로 서둘러 짐을 싸서 집을 나섰다.

일요일에 떠나 뱅크할리데이인 다음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었다. 뱅크할리데이인 월요일이 마침 할로윈데이라 도시 곳곳은 주초부터 축제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었다. 아일랜드도 언제부터인지 할로윈데이가 꽤 큰일이 되어서, 레스토랑이나 카페뿐 아니라 작은 가게들과 집집마다 유령얼굴이 조각된 샛노란 호박이 놓이지 않는 곳이 없고, 시내에서는 호러영화 페스티벌이나 거리퍼레이드 등 흥미로운 이벤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작년에는 우리도 작고 둥근 호박과 조각칼을 사다가 함께 속을 파내고 눈, 코, 입을 뚫어 호박유령을 만들었다. 난쟁이 초에 불을 붙여 호박의 텅빈 몸통 안에 넣으니 제법 조명 효과가 났다. 무섭다기보단 다소 귀엽고 띨띨해 보이는 아이였는데, 의외로 만드는 재미도 있고 거실 분위기도 오붓하게 만들어 주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도 존은 호박을 사다가 할로윈 장식도 하고 의상도 준비해 분위기를 내고 싶어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사실 좀 귀찮았다. 솔직히 아이도 없는 중년부부 둘이 할로윈이라고 들썩거리는 게 유치하단 생각도 들었다. 물론 10살 아이의 정신세계를 가진 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나의 무덤덤한 호응에 특별한 계획 없는 평범한 연휴를 보내게 되려는 찰나, 존이 그의 특기인 즉흥 제안을 했다.
"여기 웹사이트에 엄청 싼 호텔딜이 떴는데 볼래? 호텔 더블룸 1박에 3코스 석식이랑 조식 다 포함해서 75유로야!"
우리가 몇 번 이용해본 소셜커머스 사이트라 종종 이런 파격적인 가격의 쿠폰이 올라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대박이었다. 아마도 11월 초비수기에 접어든 아일랜드 호텔들이 공짜로 사람들을 재우더라도 최소한의 호텔 운영을 위해 내놓은 카드인 듯했다.
"와, 대박! 근데 호텔이 어디 있는데?"
"튬."
"튬? 거기가 어디야? 한번도 못들어본 이름인데?"
"골웨이에 있는 작은 타운이야. 그래도 규모는 골웨이에서 골웨이시티 다음으로 크다니까 나름 둘러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은데? 나도 들어만 봤지 한번도 가본 적은 없어. 관광객들이 찾는 곳은 아닌데, 아무렴 어때? 우리 둘다 가본 적 없으니까 모험 삼아 가보는 거지!"
"좋아, 콜!"
이런 결정을 할 땐 우린 아주 짝짝꿍이 잘 맞는다. 우린 바로 웹사이트에서 쿠폰을 결제하고 호텔에 전화해 방을 예약했다. 할로윈데이를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보낸다는 생각에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눈 시리게 아름다운 길 위의 가을풍경을 가득 담은 마음이 빵빵해졌을 때쯤 우리는 튬에 도착했다. 언뜻 보기에 아일랜드의 여느 시골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조용하고 아담한 타운이었다.

골웨이시티에 북쪽으로 35km 정도 떨어져 있는 튬은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오래된 타운이다. 11세기와 12세기에는 종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상업적 중심지로서 경제적인 부도 누렸다고 한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건물이 낡고 오래되긴 했지만 타운 중심에 있는 데다 방이 깨끗해서 충분히 만족했다.
존은 잠시 쉬겠다고 침대에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2시간 넘게 운전하고 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난 그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작은 호텔방을 떠도는 낯설고 조용한 공기를 즐겼다. 얼마나 멀리 왔느냐와 상관 없이 '어딘가로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충분하다. 대리석 바닥이 깔린 호텔이든, 낡은 카페트가 깔린 계단을 삐걱삐걱 올라야 하는 호텔이든, 혹은 또 다른 형태의 어떤 숙소라도, 내 집과 내 동네를 떠나 머무는 그 공간이 주는 독특한 설렘이 있다. 창밖으로 내리는 저녁하늘 빛을 바라보다 나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내가 먼저 잠이 깼다. 깜짝 놀라 시계를 보니 다행히 1시간 넘게 자진 않은 것 같다. 내 뒤척임에 존도 놀라며 눈을 떴다. 딱 알맞게 달콤한 낮잠이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를 둘러보기 위해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할로윈데이 전날이라 떠들석할 줄 알았더니 시골이라선지 조용했다. 그나마 가게 쇼윈도우의 할로윈 장식들이 분위기를 내주는데 그 장식들마저 어딘가 촌스러웠다. 하지만 난 그 수선스러운 공허가, 다정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이 좋았다.
잠을 자고 나서 그런가, 공기가 쌀쌀한데도 시원한 맥주가 생각났다. 거리가 텅 비었다고 걱정할 필요없다. 여긴 아일랜드니까! 아무리 작은 시골마을이라도, 모두가 노는 공휴일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치는 개떡 같은 날씨라도 문을 연 펍 하나는 찾아낼 수 있다.  

역시 이곳에도 한 블럭 건너 하나 꼴로 펍이 있었다. 동네청년들이 럭비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펍과 단골 몇몇이 바를 점령하고 바텐더와 수다를 떨고 있는 펍을 지나 우리의 발이 멈춘 곳은 쿨리의 존의 펍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푸른색 펍.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난로의 따듯한 온기가 '웰컴!'을 외쳐준다. 우리가 첫손님. 마치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것처럼 벽난로 좌우로 오래된 나무의자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귀여운 강아지 쿠션까지 하나씩 세트로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존은 기네스, 나는 애플사이더를 홀짝였다. 올해 나의 첫 벽난로.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 어떤 신식 히터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노란 불꽃. 오래된 벽난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일랜드의 낭만이다.

우리는 펍을 나와 동네를 한바퀴 천천히 산책한 뒤 호텔로 돌아가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호텔레스토랑이라지만 음식도 시설도 호텔 폼을 낸 시골레스토랑 수준이었지만, 어쩐지 그날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론 그런 세련되지 않음이 내가 여행 중임을 더욱 생생히 느끼게 해주고, 내 욕망에 못미치는 어떤 공백이 여행의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인내를 가르쳐준다. 여행은 그렇게 까다롭고 예민한 나를 조금쯤 더 너그럽게 해준다.
텔레비전 좀 보며 쉬다가 밤 10시 넘어 라이브음악 들으러 다시 펍에 가자고 했다가 티비를 켜둔 채 둘다 잠이 들어버렸다. 뭐, 우리에겐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났을 땐 이미 나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새벽 2시. 티비를 끄고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지만,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 침대맡에서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억울한 마음이 누그러지고 새로운 날에 대한 설렘이 찾아왔다. 존은 이곳이 너무나 좋다고 했다.  
심심한 평화 속에 저무는 밤과 아무 계획 없이 눈뜨는 아침이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아일랜드의 작은 타운 튬. 달착지근한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하얀콩과 양송이볶음에 바삭한 토스트를 곁들인 아이리쉬 브랙퍼스트를 먹으며, '최고의 할로윈데이였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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