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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Dec 07. 2016

특별한 친구들과의 생애 첫 요트 항해

 스페인어 클라스를 통해 만난 소중한 인연들

그라나다에서 계획했던 '스페인어 한달 연수'를 마치고 아일랜드로 돌아오자마자 반가운 메일을 한통 받았다. 올봄 세르반테스 스페인어문화원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셰이와 데니스가 추진중이던 스페인어 그룹과외가 성사되었다는 소식이다. 스페인문화원의 현지강사인 롤라가 셰이와 데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셰이와 데니스, 테리, 나까지 네 명을 묶어 개인그룹과외를 해주기로 한 것이다. 나름 스페인어를 배우겠다고 스페인까지 갔다온 나로서는 쉬지 않고 계속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다, 셰이와 데니스가 적극 섭외한 '믿을 만한 선생님'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지난 10월초, 나의 특별한 스페인어 클라스가 시작되었다.

일단 5명이 매주 두번 세 시간씩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데니스가 멤버로 있는 '풀백 요트 클럽(Poolbag Yacht Club)'에서 클럽빌딩의 2층 세미나 공간을, 그것도 무상으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더블린베이의 푸른 바다 위로 크고 작은 배들이 들고 나는 경관과 운치를 곁에 두고 공부할 수 있게 되다니 특별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모이는 '풀백요트클럽'이 대중교통으로 가기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었기에, 셰이가 가는 길에 나를 가까운 랜스돈 다트역에서 픽업해 주기로 했다.
첫 수업은 선생님인 롤라나 학생인 우리나 어디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해나갈지 결정하느라 좀 어수선했지만, 두번째 수업 이후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고 나니 훨씬 재미가 났다. 수업은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3시간씩. 존과 있을 때 말고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인 나에게는, 스페인어 공부를 떠나 '일주일에 6시간'씩 투자하는 인간적 관계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것도 나름 내가 정예멤버로 합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은퇴한 아이리쉬 아저씨 세 명과 아일랜드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겠다고 달려든 한국여자 하나의 생뚱맞은 조합.
데니스가 섭외한 스페인어강사 롤라는 마드리드 출신으로 수수한 외모와 털털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다.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내 또래인 것 같았고, 스페인 여자답게 자그마한 몸집에서 많은 에너지가 나오는 사람이었다.
수업은 짱짱하고 탄력있게 진행되는 날도 있고 효율성이 조금 아쉬운 날도 있었지만, 스페인어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은 늘 행복했다. 스페인어 공부도 재밌었지만, 그보다도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네 사람 때문이었다.

첫사랑과의 이른 결혼과 이혼, 또 다른 연인과 5년의 동거 후 이제 홀홀단신 집 대신 마련한 요트에 꿈을 싣고 3년간의 긴 항해를 준비하고 있는 데니스. DCU(Dublin City University) 교수를 지낸 경력에도 늘 겸손하고 친절한 학자 타입의 셰이, 가정적인 사업가로 은퇴 후 스페인 별장에서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애처가 테리. 좋은 선생님이자 소탈하고 커다란 웃음이 매력적인 롤라.
더블린에서 나고 자란 진정한 더블리너 친구들은 그들이 직접 체험한 아일랜드의 산 역사나 내가 아는 어떤 거리나 장소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등 내가 미처 몰랐던 아이랜드의 속내를 비밀스레 공유해 주었고, 스페인어는 물론 스페인의 문화와 역사 전반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스페인에 대한 나의 관심을 더욱 깊고 넓게 확장시켜 주었다. 그들이 좋아질수록 뭔가 더 많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그리고 처음으로 잡채나 불고기 따위의 대표적인 한국음식 몇 가지를 제대로 배워놓지 않은 것, 아무 때나 집에 놀러오라고 말할 수 있게 평소 집 정리를 깨끗이 해놓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러던 어느날, 데니스가 내 아쉬움을 달래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내 요트로 더블린베이를 항해할 생각인데 시간되면 같이 가자. 와이프나 남편, 애인 다 데리고 와도 좋아!'
호탕한 성격의 데니스의 자신이 보물처럼 아끼는 새 요트의 항해에 우리를 은쾌히 초청했고, 뜻밖의 드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나머지는 모두 같이 가기로 의기투합했다. 요트는 물론 작은 고깃배, 커다란 무역선 할 것 없이 배만 보면 정신을 못차릴 만큼 좋아하는 존은 나보다 더 들뜬 눈치였다. 옛날 기억을 살려 선장 데니스를 확실히 보필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가을이 깊어가는 10월말의 토요일이었다. 바다 위에서 1시간 넘게 바람과 맞서려면 옷을 단단히 입어야 한다는 데니스의 경고에 난 올해 처음으로 오리털패팅을 꺼낸다. 지난 1년 옷장 속에서 잠자고 있던 오리털들을 두드려 깨우니 다시 폭신하게 부풀어 올랐다. '올 겨울도 잘 부탁해'
아일랜드의 풍경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크고 작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하얀 요트들이다. 바다가 고요한 날의 평화로운 쉼, 맑은 날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과의 우아한 댄스, 때론 비바람치는 날 돛에 달린 작은 종들이 프리재즈를 연주하듯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전방위적으로 휘청거리던 위태로운 모습으로 내가 한국이 아닌 아일랜드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곤 했다. 그렇게 지난 6년간 눈팅만 했던 그 하얀 요트 위에 드디어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주 블랙락컬리지의 토요일 쉬프트가 걸려 못가게 된 존은 잔뜩 풀이 죽었다. 나는 실망한 그를 달래려 '데니스가 항해하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하라고 했으니까 곧 다시 갈 수 있다'고 살짝 부풀린 약속 같은 걸 해버리고는 그의 출근길에 따라 나섰다.

11시반쯤 '풀백 요트 클럽'에 도착하니 먼저 온 데니스가 클럽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그의 모닝커피 테이블에 합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셰이와 롤라가 도착했다. 테리는 스페인 여행 중이라 못온다고 했다. 데니스는 초짜 선원 셋을 데리고 그의 요트로 향했다. 데니스가 집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연인처럼 애정하는 그의 요트 '쎄오라이레(Ceolaire; 노래하는 작은 새 'warbler'를 뜻하는 스페인어)'가 희고 매끈한 몸매를 드러내며 우리를 맞았다. "바람이 좋아서 항해하기 딱 좋아! 첫 항해에 날씨가 이 정도 도와주다니 당신들 행운아인 걸? 하하." 날씨가 흐려 항해하기 괜찮을지 걱정하던 내 마음을 읽은 듯 데니스가 말했다. 그리고는 선장다운 카리스마로 우리를 한곳에 모아 배를 타고내릴 때, 그리고 배 안에서 숙지해야 할 주의사항을 설명해 준 다음 구명조끼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에 오른 우리에게 데니스가 각각 앉을 자리를 정해준 후, 배에 묶여 있던 닻줄을 풀었다. '쎄오라이레'가 정박한 요트들 사이를 천천히 빠져나오자 넓고 푸른 바다가 시야 가득 펼쳐졌다. 모터의 도움을 받아 '쎄오라이레'가 항구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데니스가 모터를 끄고 운전대를 셰이에게 넘겼다.
"셰이! 네가 먼저 키를 잡아봐."
"정말? 내가 해봐도 되는 거야?"
"하하, 모두 한번씩 해볼 거니까 걱정마."
셰이가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키 앞에 섰다.
"저기 바다 위로 솟아있는 빨간색 깃발 보이지? 저 푯대를 향해 가면 돼. 절대로 푯대에서 눈을 떼면 안돼!"
그 사이 데니스는 돛을 올리고 풍향계로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수시로 확인하며 '쎄오라이레'가 바람을 잘 탈 수 있도록 리드해갔다. 서너 번째 푯대 곁을 지났을 때 데니스가 롤라를 불렀다.
"이번엔 롤라! 쉐이, 롤라에게 키를 완전히 넘길 때까지 자리를 뜨면 안돼!"
롤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입이 귀에 닿을 만큼 커다란 미소를 내내 입에 건 채 다음 푯대를 향해 키를 움직였다.


데니스가 경고하긴 했지만 직접 경험하는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훨씬 날카로웠다. 오리털패딩에 겨울목도리, 모자까지 두 겹으로 뒤집어 썼는데도 바람이 불 때마다 피부까지 닿는 듯한 한기에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모터를 돌려 조금 서둘러 배를 몰아 목적지에 닿았다가 항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데니스는 "진짜 항해의 묘미는 모터의 힘이 아닌 자연바람에만 의지해서 가는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원하는 방향이나 속도로 가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서 새로운 바람을 오래도록 기다려야 할 때도, 부득이하게 경로를 바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모든 불확실성과 인내의 과정 안에 항해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대자연과의 교감, 고독한 자유가 있다고 했다.
"다음은 마야!"
막상 내 이름이 불리니 바짝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선장의 명령인 만큼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 키를 잡았다. 데니스의 도움을 받아, 다음 푯대를 향해 조금씩 키를 움직였다. 막상 배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니 긴장감이 사라지고 신이 나기 시작했다.

'쎄오라이레'는 아주 느린 속도로, 하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과 화합하여 왼편 멀리 보이는 호스의 절벽과 등대가 향해 나아갔다. 바다 위에서 육지를 향해 바라보는 더블린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더블린 베이에서 던리어리, 도키, 호스로 이어지는 육지의 실루엣이 낮은 구름들과 푸르스름한 물빛에 물들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아야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자연에서든 인생에서든, 내 고정관념이나 익숙한 습관에 매몰되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느끼는 짜릿한 희열. 그때 갑자기, 무슨 신의 계시라도 떨어질 것처럼 구름이 걷히고 빛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야, 잠깐 키를 놓고 이쪽에 와서 앉을래?"
바다 한폭판에서의 휴식. 셰이가 집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넉넉히 만들어온 샌드위치 보따리를 베낭에서 꺼냈고, 데니스는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갑판의 작은 테이블 위에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점심식탁이 차려졌다. 우리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서로의 체온과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있을 때, 샌드위치 냄새를 맡고 온 갈매기들이 배 주위를 날며 끼룩거렸고, 쏟아지는 햇빛조각들이 잔잔한 물결 위에서 부서지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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