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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Dec 15. 2016

겨울나라에서 여름나라로

<호주 시드니 여행 1> 남편의 가족을 만나러 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시간이 두 배로 빨리 가는 것 같다. 한국방문 계획을 세울 때는 늘 '좀 오래 머문다' 싶은 느낌으로 날짜를 잡지만, 막상 한국에 와서 '한국에 가면 해야할 일과 하고싶은 일'들로 하루하루 스케줄을 채워나가다 보면 늘 시간이 모자르다. 그리웠던 사람들과의 만남 하나하나가 결혼 전의 나를 다시 만나는 과정이자, '떠남'이 곧 '잊혀짐'은 아니라는 위로다. 솔직히 존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지나가는 날도 많다. 나는 외국에 사는 다른 친구들보다 자주 한국에 오는 편인데도 그렇다. 아니, 어쩌면 한국에 자주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양한 인연의 끈을 놓치지 않올 기회가 그들보다 많았는지도. 어쨌든 그렇게 정신없이 2주를 보내고 나니, 이제 호주 시드니로 떠날 시간이다. 왜 뜬금없이 '시드니'냐고? 존이 10년 넘게 보지 못한, 그리고 나는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한 존의 형제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일전에 존의 펍에 대한 글을 쓰며 잠깐 언급했지만, 존은 4남매 중 막내로 존이 아주 어릴 때 온 가족이 호주로 이주했다. 하지만 몇 년 되지 않아 존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4남매를 키울 여력이 없었던 존의 아버지는 존을 아일랜드에 사는 릴리이모에게 보냈다. 존은 그렇게 어머니의 고향인 쿨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시드니에 정착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존이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보러 호주에 간 것이 10여년 전이라니, 쏜살같은 세월 앞에 '가족'이라는 이름조차 무상해진다. 그 사이 존의 아버지가 9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고, 존의 형 캐빈의 둘째가 태어났으며, 몇 년 후 캐빈은 아이들의 엄마인 시몬과 헤어졌다. 반면 존은 한국여자인 나와 결혼했으며, 호주에서 배달온 아버지의 유골을 나와 함께 쿨리 바닷가의 하얀 파도에 실어보냈다.



존도 20대 후반, 호주 시드니의 가족 곁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커다란 무역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보낸 10여년 후 시드니로 날아가 친구와 카페를 운영하며 몇 년을 살았는데, 어느날 문득 아일랜드가 못견디게 그리워지면서 자신이 있을 곳은 아일랜드라는 확신이 들었단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짐을 쌌다고. 사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거의 관계없이 지내는 '깨어진 가정'이었기에 마음을 두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때 아일랜드로 돌아와 몸과 마음을 모두 정착한 존은 '영국여권', '호주이민가족'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늘 '아이리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갑자기 호주에 있는 가족들을 보러 가고싶다고 했다.
"내가 살았던 곳들을 다시 가보고 싶어. 새 어머니랑 형, 거기 있는 친구들도 보고싶고. 아무리 안 친한 가족이라지만 얼굴 본 지 10년이나 지났고, 게다가 우리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널 내 가족들한테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사실 조금 의외였다. 내가 호주에 가고 싶냐고 물을 때마다 늘 '별로'라고 대답하던 그였다. 드물게나마다 존이 연락하고 지내는 가족은 형인 캐빈이 유일했는데, 그나마 먼저 연락하는 건 항상 존 쪽이었다. 그것도 3번에 2번은 연결이 되지 않았고, 존이 음성메시지를 남겨도 나중에 전화가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형이 너무하지 않냐'고 서운해 할 때마다 나도 캐빈에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형과 통화하는 존의 목소리는 늘 어린아이처럼 달떠 있었다. 한번도 먼저 연락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린시절 부르던 별명을 부르며 낄낄대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 뮤지션인 형과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형이 최근에 결성한 밴드가 뜻밖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누나들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가끔 캐빈을 통해서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대화하는 방식이 아주 특이하다"는 첫째누나와 "같이 있으면 1분 안에 싸움 난다"는 둘째누나 모두 결혼하지 않고 싱글로 살고 있다고 했다.
피를 나눈 누나들보다도 존이 더 보고싶어 하는 사람은 '새어머니'다. 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한 인도여자인데, 존을 키워준 적은 없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새어머니가 아니지만 존은 꼭 '맘'이라고 불렀다. 존이 성인이 되어 호주의 아버지집을 찾아갔을 때 자신을 진심으로 반겨준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처음 만난 새어머니였다. 단 며칠이었지만 그 집에 묶는 동안 지극정성으로 대접해 주었던 그분의 따스함 덕분에 존은 자신을 보자마자 혀를 차며 등돌렸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존은 새어머니가 해주었던 인도음식 얘기를 종종 한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인도요리였어. 네가 정말 좋아했을 거야!"라며. 그런데 드디어 캐빈을 통해 새어머니와 10년만에 연락이 되었고, 이번에 우리가 호주를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를 그녀의 집에 초대했다. 우리는 이번 여정의 이틀밤을, 존의 새어머니집에서 함께 보내기로 했다.

시드니로 떠나는 날, 엄마는 내가 괜찮다는데도 굳이 구파발역 공항리무진 정류장까지 나와 동행해주었다.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버스정류장 아래 서 있는데, 햇살이 포근하고 눈부셔서 봄이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문득 엊저녁 휴대폰 너머 '형부가 아무것도 못먹는다'며 울먹이던 언니의 힘 빠진 목소리가 생각났다. 형부는 하루하루 힘들게 삶을 붙잡고 있는데 이렇게 속절없이 날씨는 화창하고, 난 감히 '여행'이란 걸 떠난다.
2주 후면 다시 볼 거지만 그래도 헤어지려니 슬퍼져, 버스에 오르기 전 엄마를 꼬옥 안았다.
"2주 후면 다시 보는데 뭘 그래!"
역시 우리 엄마답다. 청소하다 내가 아일랜드에서 사온 크리스마스카드를 발견하고는 '왜 4.75유로나 하는 비싼 카드를 샀냐'고 나무라셨지만, 나랑 헤어져 집에 가면 내가 드린 크리스마스 카드를 펼쳐 사방탁자 위에 잘 보이게 올려놓으시겠지.
인천공항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중국 북경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리고 이제 북경국제공항에서 마지막 목적지인 시드니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난 '가족'이라는 특별하고 미묘한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갑자기 존이 못견디게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이제 8시간 후면, 뜨거운 호주의 겨울태양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만난다. 우리는 한국에 있는 아픈 형부를 생각하며 함께 마음 아파하며 기도할 것이고, 또 그의 형과 누나, 조카들, 새어머니와 함께 어쩌면 우리의 일생에 한번뿐일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것이다. 존이 진심으로 나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처럼 이제 내가 그의 가족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차례다. 그렇게 지금 나는, 겨울나라에서 여름나라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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