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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an 03. 2017

그리움과 재회 사이

호주 시드니 여행 2 - 존의 친구 브래들리

한창 뜨거운 여름햇살로 가득해야 할 시드니는 생각보다 날씨가 차고 흐렸다. 도착한 날도 시드니공항에서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더니,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루종일 비가 뿌리면서 온도가 20도 아래로 뚝 떨어졌다. 온통 여름옷만 가지고 온 나는 난감해졌다. 설상가상, 혹시나 하고 아일랜드에서 챙겨온 후드자켓과 얇은 가디건마저 마지막 순간에 짐에서 빼고 왔다. '시드니는 지금 40도가 넘을 거야!'라며 노래 부르던 존의 말에 세뇌되어 더운 날씨 걱정만 했던 탓이다. 나름 고르고 골라 가져온 예쁜 옷들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한국에서 입고온 청바지와 스웨터 차림으로 몇날며칠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햇빛알러지로 고생하는 것과 비교하면, 추워서 떠는 편이 낫다고 감히 말하겠지만.
어쨌든 시드니다. 개인적으로 시드니만 3번째 방문이니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서른을 막 지나던 해 생애 첫 '나 홀로 베낭여행'을 왔었고, 2년반 후 청년부 친구들과 시드니 힐송교회에서 주관하는 '힐송컨퍼런스'에 참가하기 위해 다시 찾았다. 같은 도시에 있었지만 아주 다른 성격과 목적의 방문이었고, 두 번의 여행이 남긴 추억과 의미도 전혀 다르게 남아 있다. 이후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던 이곳에, 또 다른 이유로 머물고 있다.

존은 도착하자마자 형과 새엄마,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잡느라 분주했다. 그나마 처음 이틀은 둘만의 자유시간이었다. 우린 호텔방에서 달콤한 오수로 긴 비행에 지친 몸을 쉰 후 이른 저녁 거리로 나와 시드니와 제대로 재회를 했다.
'안녕, 오랜만. 14년 만에 다시 만나네. 널 많이 사랑했지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그녀는 더욱 세련되어지고 여러 인종과 문화를 품는 다양성은 여전히 풍성해 보였다. 동시에 정신없이 복잡해졌고 물가는 얄밉게 올라 있었다. 물론 써큘러키의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 달링하버의 야경은 변함없이 가슴뛰게 아름다웠다.


우리가 만난 존의 첫 번째 친구는 브래들리. 그도 존처럼 뮤지션이라 했다. 우아한 건축양식의 빅토리아빌딩 안의 카페와 상점들을 구경하다 오후 5시에 맞춰 그를 만나기로 한 타운홀 앞으로 갔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먼저 알아본 건 나였다. 아기 때 호주의 양부모에게 입양된 이태리인의 핏줄. 선천성 약시와 소아마비를 안고 살아왔지만 누구보다 쾌활하고 유머러스운, 그리고 조금 이상한 친구,라는 존의 소개를 기억하고 있던 나에게, 멀리서도 눈에 띄는 가무잡잡한 피부와 굵은 금팔찌가 말해주는 '이탈리아스러움'이 눈에 띈 것이다.
우린 다운타운에 있는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따뜻한 커피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긴 시간의 공백을 단숨에 이어주는 건, 함께 나눴던 시간의 기억이다. 10년 전의 추억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지고, 잊고 지냈던 누군가가 불현듯 현재의 시간 속으로 뛰어든다. 이어 가족들의 안부와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다보면 현실은 추억처럼 마냥 아름답거나 녹록치 않다는 걸 알게 되고, 훌쩍 먹어버린 나이가 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커피잔이 비워질 때쯤 브래들리는 자신의 음악들이 담긴 앨범 한장을 건넸고, 우린 다음날 저녁 브래들리네 동네의 중국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브래들리가 사는 캐린바 타운은 시드니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었다. 넓은 4차선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낡은 집과 가게들이 거친 느낌을 주는 동네다. 이동시간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고 출발한 데다 식당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거의 30분이나 지각을 했다. 휑하니 넓은 식당 한가운데 놓인 둥근 테이블에 브래들리와 그의 여자친구 캐시, 브래들리의 어머니 돈이 앉아 있었다. 다행히 모두 우리의 무례한 실수를 너그러히 용서해주었다.
그런데 식당 분위기가 어쩐지 으스스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뿐인데 에어컨은 빵빵 돌아가고 식당 한켠에는 테이블 대신 지붕에서 새는 물을 받기 위한 퍼런 양동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수십 년은 되어보이는 붉은 카페트 위로 먼지더께가 가득하다.
정신불안증이 있어 약을 먹고 있다는 캐시는 멍한 표정으로 계속 미소를 짓고 있고, 브래들리는 그런 캐시가 못견디게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연신 키스를 해댔다. 존과도 잘 알고 지냈다는 돈은 8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게 정정했다. 특히 브래들리의 괴짜 같은 농담들을 지지않고 받아칠 만큼 유머의 내공의 상당했는데, 덕분에 식당의 호러영화 분위기에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웃음으로 많이 풀어졌다. 뿌리도 다르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할 수 있었던 그녀의 강인함을 엿본 듯 했다.
브래들리가 '최고'라고 칭찬하던 것과 달리 음식은 형편없었다. 달고 맵고 신 정체불명의 소스에 볶아나온 두부와 야채 조각들을 먹는 동안 와인으로 연신 입가심을 해야했다.
존과 나는 가끔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적응 안되는 분위기에 대한 위로를 공유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의 만남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순간이 종종 있다.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모양으로 사는 동안 생성된 다른 생각과 가치를 발견하는 순간, 불현듯 느껴지는 거리감 같은 것. 하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할 수 없고, 만남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헤어질 때는, 언제 어디가 될 지는 모르나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우리는 브래들리 가족과 헤어져 시드니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와인에 알딸딸해진 정신 속으로 졸음이 스멀스멀 침투해들고 있었다. 낯설거나 익숙한 기차역의 이름들이 귀와 눈에 들어오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시드니 타운홀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존이 물었다.
"오늘 저녁 먹을 때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고 우습지 않았어?"
"맞아. 식당이 무슨 호러영화에 나오는 식당 같더라."
"사실 음식 맛도 진짜 별로였어."
"맞아. 정체불명ㅋㅋ"
"내 친구 브래들리...어떤 것 같아?"
"당신이 말한 대로 좀 괴짜더라. 유머감각이 부담스럽게 특이하달까, 하하. 그래도 재밌고 좋은 사람 같았어. 당신과 함께 쌓은 추억담에 대해 듣는 것도 재미었고."
"그래, 다행이다. 나도 반갑고 좋았어. 근데 솔직히 이번 만남은 이걸로 충분하다 싶더라."
왜냐고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지만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드니 거리에서 <빅이슈> 잡지를 팔고 있던 브래들리와 처음 말을 튼 후 거의 매일 오다가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점 친해져 친구가 되었다는 두 사람. 서로의 공연에 가서 응원도 해주고, 존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브래들리가 아일랜드에 와서 한동안 브레이 아파트에서 한달 정도 존과 함께 지낸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10년 후의 재회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만큼 현재와 사이의 공백도 보여주었을 것이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연스레 과거의 시간, 과거의 인물들을 꺼내 이야기하다 보면 대화에 주어진 시간은 끝나고 현재의 삶은 '다 괜찮아' 식으로 짧게 마무리되곤 하던. 그렇게 변해가는 인연을 허무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혹은 성숙하며) 관계를 받아들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멀어지는 인연을 억지로 붙들려 애쓰지 않는 동시에 언제든 다시 맞이할 수 있는 마음을 열어두고, 새로운 인연을 의심이나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정성드려 가꾸어나가려 노력한다. '인간관계'란 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성장과 쇠퇴, 회복의 과정을 반복하기 마련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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