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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an 31. 2017

새해와 새해 사이, 돌아오다

 2017년 아일랜드의 삶을 시작하며

조금 오래 떠나있었나 보다. 두달 만에 만난 아일랜드는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낯설었다. '돌아옴'보다 '헤어짐'이 더 크게 느껴졌던 탓이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니다. 언니도 조카도 내가 떠나는 걸 다른 때보다 더 아쉬워했고,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던 엄마는 "이번엔 유난히 섭섭하네"하며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에도, 울먹이며 돌아서던 엄마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마음이 쓰렸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면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전날 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짐을 싸다가 존의 전화를 받았다. "너 주려고 구운 감자를 스무 개나 챙겨놨어."라고 그가 말하는 순간, 아일랜드로 돌아간다는 실감이 확 났다. 파삭파삭 분나는 감자를 실컷 먹을 수 있는 곳. 미우나 고우나 내 인생의 짝꿍인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2017년 신정을 보내고 구정이 다가오는 사이, 나는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아침 8시가 다 되었는데도 캄캄하다. 해가 유난히 짧은 유럽의 겨울 속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밥과 나물 대신 아보카도랑 루꼴라, 썬드라이드 토마토 페스토와 후무스(병아리콩으로 만든 중동식 소스)가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존이 채워준 냉장고. 맛은 엄마가 해준 시원한 근대국과 매콤한 고추조림을 따라갈 수 없지만, 아일랜드에서 나의 아침을 행복하게 열어주는 일용할 양식들이다.
나는 바삭하게 구운 빵에 토마토 페스토와 후무스를 바른 후, 잘 익은 아보카도를 얇게 도려내어 올리고 루꼴라를 몇 잎 올려 그럴 듯한 오픈토스트를 만든다. 맛있다. 그러고 보니 이 맛이 그리웠던 것도 같다.

이틀전 밤늦게 도착해 어제부터 정상생활을 하겠다고 덤벼든 것이 무리수였다. 아침일찍 출근하는 존을 따라 나섰을 때만 해도 시차 같은 건 크게 못느꼈더랬다. 클리우디아의 요가 클라스를 재등록하고, 잔뜩 굳어버린 몸을 열심히 늘리며 시원하고 개운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젯밤 새벽3시에 눈이 떠진 후 잠이 안 오더니 아침을 먹고 나자마자 몸이 까부러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요가로 근육들이 놀랐는지 온몸이 쑤시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출근하는 존을 배웅하자마자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간 나는 점심 때쯤 걸려온 그의 전화도 받지 못하고 비몽사몽 꿈과 현실을 헤맸다. 머리도 아프고 목도 칼칼한 것이 감기가 오려나. 꿈에 조카 채환이와 언니, 형부, 엄마가 차례로 등장하는 덕분에 눈을 뜰 때마다 여기가 한국인지 아일랜드인지 헷갈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눈을 뜰 때마다 굵은 시계바늘이 정확히 한 눈금씩 옮겨져 있었다.

다시 눈을 떴고, 굵은 바늘이 숫자 3을 넘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계속 누워 있다가는 곧 다시 밤이 되고 말 것이다. 창 밖에는 아침 8시에 바라보았던 것과 비슷한, 나즈막히 푸른빛의 하늘이 걸려 있다. 짧은 겨울해가 벌써 하루 일을 마감할 준비를 하려는가.
이날의 원래 계획은 '짐정리와 집청소'였으나 해가 지기 전에 일단 바깥 공기를 좀 쐬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터를 껴입고 패딩을 지퍼 끝까지 채우고 집을 나섰다.

'참 게으른 날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늘 죄책감이 함께 온다. '느리게 살기'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도 내 안에는 '게으름'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못하는 자아가 있다.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나의 인식은 '하룻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가'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고, 그 일들은 무언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도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지기도 한다. 내 안에는 게으름마저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즐기며 살고 싶은 바람이 있지만, 자라온 환경과 시대의 교육방식, 타고난 성격을 바꾸기가 어디 그렇게 쉽던가. 그래도 오늘만은 나에게 좀 너그러워지고 싶다. 시간을 거꾸러 거슬러 오느라 아직도 피곤하고 노곤한 몸뚱어리가 다시 아일랜드 시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고, 가슴에 고여있는 헤어짐의 여운이 아일랜드의 차갑고 깨끗한 공기에 씻겨내리고 나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늘 지나던 길을 따라 브레이타운까지 걸었다. 바람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고, 공기는 맑고 건조했다. 한국을 떠나던 날처럼 햇빛마저 눈부셨다.
막상 걸음을 떼기 시작하니 천근만근 같던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개천을 따라 몇 년째 작업 중인 제방공사 현장은 아직도 여기저기 크레인과 흙더미로 어지러웠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일을 쉬고 있는지 시끄러운 기계음은 들리지 않았다.
존은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공사에 대해 불평했지만, 오랜만에 익숙한 풍경을 보니 그마저 반가웠다. 늘 텅 비어 있는 피자배달가게와 아침마다 존과 커피를 사가는 센트라 편의점을 지나 오른쪽 좁은 길로 꺾어져 걸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서다. 언뜻 보면 평범한 공원이지만, 공원 너머 언덕 위의 오래된 교회와 집들, 하늘 그림자 속을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까마귀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콜라보레이션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내가 꼽는 가장 아일랜드스러운 풍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브레이의 공원은 개들의 천국이다. 브레이에 사는 모든 개들이 모여드는 듯, 크고 작은 개들이 푸른 잔디밭을 신나게 가로지르며 산책도 하고 볼일도 본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은 검정색 래브라도다. 골드리트리버에게 1순위를 뺏긴 건 순전히 내 애칭인 '검둥개' 때문에 내가 까만 개에게 집착적인 애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랜만에 커다란 개들이 마음껏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에게도 녀석들의 자유로움이 전이되는 듯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공원을 빠져나와 타운센터로 꺾어지기 직전에 있는 모퉁이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의 한국 스타벅스와 달리 이곳 아일랜드 브레이의 스타벅스는 보통 노트북 작업자보다 유모차 끌고 마실 나온 동네 주부들, 아침식사하러 나온 가족들, 잡답하는 학생 무리로 왁자지껄하다. 격식 없고 시골스런 영어악섹트에 둘러싸여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정말 아일랜드로 돌아왔구나.'


다음날은 아니나 다를까,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하늘은 계속 낮아져 땅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았고, 휘돌아치는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잔인하게 헝클어뜨려 놓았다. 휴대폰으로 날씨를 다시 확인해 봤지만 기온은 영상이다. 아일랜드의 전형적인 겨울날씨랄까. 이런 날이 며칠째 계속되는 가운데 나는 여전히 한국의 시간을 좇아가려는 나의 생체리듬을 조절하려 애쓰며 다시 조금씩 아일랜드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음으로 다시 제 시간에 눈을 뜬 아침. 아일랜드로 돌아온지 딱 일주일째되는 날이었고, 공교롭게도 '설날'이었다. 명절이라고 한국의 친구들은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분주할 시간, 아일랜드에 사는 나에겐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겉보기엔 그랬다. 하지만 떡국 대신 토스트와 감자를 먹으면서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혼자 명절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생일이라도 그 의미 자체로 특별한 것처럼, 어떤 날들은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아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이번 설은 한국방문의 후유증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일랜드의 삶을 품으라는 날이다. 한 달 만에 무뎌져버린 새해 결심과 계획들을 다시 벼려, 2017년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라는 날이다.

마침 존이 쉬는 토요일이라 오전엔 집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이브 코스로 더블린까지 차를 몰아, 모처럼 햇빛이 반짝이는 더블린 시내를 함께 걸었다. 어쩌면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이 길을 걸으려고 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엔 엄마가 주신 된장에 호박을 자박하게 썰어 넣고 맑은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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