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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Feb 08. 2017

애쉬포드 마운트어셔 가든의 초록빛 힐링

- 아이리쉬 고뿔과 윈터블루스 극복기

드디어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질 나쁜 녀석에게 말이다. 일주일 동안 따로 잔 보람도 없이 존에게 옮은 게 틀림없다. 하긴 이미 집안에 감기바이러스가 가득한데 잠만 다른 방에서 잔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겠는가만.
침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목이 아프던 아침, '이건 우습게 볼 놈이 아니군!' 하는 직감에 그날 하루는 종일 집에서 쉬기로 맘먹었다. 전기장판 깔린 침대 위에 누워 열이 오르내릴 때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었다. 그래도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는 생각에 억지로 일어나서 비상식량으로 꿍쳐뒀던 캔 수프를 데워먹고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런데 하루종일 집에 갇혀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카페인이 몸시 땡겼다. 어디 슬슬 나가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올까 싶었지만, 그 생각은 이내 하염없이 가라앉는 몸뚱어리와 함께 사장되고 말았다.
다음날 결국 못참고 밖을 나돌아다닌 것이 실수였다. 겨우 다스려놨던 기침과 콧물이 대책없이 심해지고 머리도 깨질 것 같이 아프기에, 저녁 때 존과 IFI 영화관에서 <좋은 친구들>을 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냥 저녁만 간단히 먹고 들어왔다.

결국 그 다음날은 도로 침대 신세. 계속 잠을 자는 게 아닌데도 하루종일 누워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존은 다른 증상 없이 쇤기침만 심하게 하면서 나더니 나한텐 업그레이드된 열감기로 왔다. 열이 나니 머리가 핑핑 돌면서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물을 마셔도 마셔도 조갈이 심하게 나고, 코를 풀어도 풀어도 누런 콧물이 그치지 않는다. '타국에서 아프면 서럽다던데' 하고 생각하니 진짜 서러워지려 했다. 특히 아일랜드는 한국보다 의료비가 훨씬 비싸기 때문에(동네의사 한번 보는 데만 무조건 50유로 정도 든다.) 나도 모르게 '아프면 안된다'는 강박을 안고 살게 된다. 더구나 여긴 건강보험이 100% 사보험인데다, 존이 가지고 있는 보험으로는 존 한 사람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아무 때나 전문의에게 진료받을 수 있고 가장의 공단보험으로 온 가족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비해 꽤 야박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서러운 건 서러운 거고, 일단 살고 봐야겠기에 혹시 어디 굴러다니는 종합감기약이 있나 뒤져보니 포장을 뜯지도 않은 감기약이 몇 팩이나 나온다. 한국에 갔다 올 때마다 혹시나 하고 한 개씩 사온 것들인데, 그동안 제법 용하게 몸살감기를 피하며 살아왔나보다. 그런데 설명서에 있는 주의사항을 읽다보니 부작용에 대한 경고가 무시무시해서 약을 먹는 게 주저스럽다. 물론 가능성이 높지 않으니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파는 것이겠지만. 일단 난 당장 아픈 게 괴로우므로 열심히 끼니마다 두 알씩 챙겨먹었다.

그날 저녁 존의 퇴근길에는 제임스도 함께였다. 내 별명을 따서 작년에 결성한 '블랙독밴드'의 새해 첫 연습모임이었는데, 난 도저히 같이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미안하지만 계속 침대에 붙어 있었다. 존은 '블랙독밴드에 블랙독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의미의 말)이라며 아쉬워했지만, 솔직히 난 내가 그저 밴드의 감초 역할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존의 말을 '찐빵이 좀 식었거나 싱거운 정도'로 해석했다. 하지만 새해결심 리스트에 '열심히 기타와 우클렐레, 바우런을 연습해서 '블랙독밴드'의 주요멤버로 발돋움하기'가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 덩치도 작고 배우기도 쉬우니 우클렐레를 배워보라고 존이 바람을 넣었다는 건 진짜 비밀이다. 다가오는 내 생일날 그가 사주기로 한 우클렐레가 자고 있는 기타 옆에서 나란히 자게 될 지, 기타를 깨워 함께 제대로 놀게 될 지 두고 볼 일이다. "내가 은퇴하면 네가 버스킹해서 나 먹여살려"라는 존의 농담에 약 10분의 1초 동안 부담이 되었다는 고백은 차치하고라도, 나만의 노래를 만들어 부를 수 있다면 이 길고 우울한 아일랜드의 겨울을 조금 더 가볍게 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존과 약속한 '남미여행과 버스킹'의 꿈이 왠지 조금 더 빨리 이루어질 것만 같다.  

종합감기약 2팩, 총 20알의 투명한 빨강 캡슐을 다 먹었을 때쯤 지독했던 두통과 인후통이 많이 희미해졌고 친구의 페북페이지에서 그날이 '입춘'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도 여지없이 종일 비바람이 불었고 나는 겨우 다스린 감기가 도로 심해질까 두려워 전기장판에 껌딱지처럼 붙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창문에 코를 박고 둘러봐도 어디서 봄이 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음력절기는 역시 동양의 달력에만 적용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인 일요일. 고맙게도 해가 반짝, 났다. 전날 날씨와의 대비효과 때문인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가자! 산드라가 말했던 가든 가볼래?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것 같아."
존이 직장동료인 산드라에게 문자를 보내 그녀가 추천했던 가든 이름과 위치를 물었다.
애쉬포드(Ashford)에 있는 '마운트어셔 가든'(Mount Asher Gardens)을 향해 가는 길. 언제 그렇게 많은 차들이 있었나 싶게 도로가 붐볐다. '날씨 좋은 일요일'은 아이리쉬들에게 로또 당첨 같은 거다. 집밖으로 나가야할 이유 100%, 기분좋게 술 마실 이유 200%. 마치 태양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처럼, 차들은 눈부신 빛줄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20분쯤 달렸을까, 비밀의 정원 같은 가든의 입구가 나타났다. 소박한 나무간판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개인주택의 마당처럼 아기자기한 공간이 나온다. 아보카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모종이나 꽃을 파는 가든숍과 작은 갤러리를 골고루 둘러보고 디자인숍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샀다. 한겨울에 꽃이 활짝 핀 정원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꽃 없는 정원을 둘러보는데 7.5유로라니 꽤 비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우리는 이정표가 안내하는 추천루트를 따라 돌기로 했다. <야생화>라는 푯말이 꽂혀있는 작은 들판을 지나 커다란 나무들이 양옆으로 호위하는 숲길로 들어서니 청량한 물소리가 들린다. 걸을 수록 물소리도 가까워지더니 이내 눈앞에 작은 강과 흰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 중간쯤 서서 가든 전체를 바라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맑은 수면 위로 떨어지는 햇살, 각기 다른 모양의 나무들과 사이로 난 숲길들, 그리고 새소리...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리 건너편에는 고풍스런 저택과 잘 손질된 정원이 있었는데  '프라이빗' 사인과 함께 굵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아마도 가든 소유주의 사택인 모양이었다.

가든 소유주의 사택으로 보이는 멋진 집과 정원

그러고 보니 그런 종류의 오붓한 산책은 꽤 오랜만이었다. 도심을 걸을 때는 주위에 이목을 빼앗겨 서로의 마음과 순간의 느낌에 잘 집중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조용한 숲길을 손잡고 숲길을 도란도란 걷고 있자니 잡고 있는 손의 온기, 나에게 말하고 있는 존의 마음 결까지 오롯이 느껴졌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뭇가지 끝에서 솟아나고 있는 작은 잎새들과 아기피부처럼 뽀얗게 돋아나는 야생화 꽃봉우리들! '입춘'. 봄은 공평하게 아일랜드의 대지에도 상륙했다.
다리를 돌아나와 다시 숲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 한편에 세워진 작은 비석들이 내 발길을 멈춰세운다. 조지, 개리, 탐...익숙한 이름들인데 왠지 일반 비석과 달라 보여 자세히 들여다 봤다. 기록된 삶의 시간을 보니 대체로 20년 정도. "이 가든의 소유주 가족과 함께 살았던 애완견들의 묘지일 거야." 존의 말을 듣고 다시 묘지를 바라보니 마음이 애틋해진다. '예삐'에게도 이런 숲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줬으면 좋았을 텐데. 오래전 떠난 내 작은 치와와가 몹시도 그리웠다.


아일랜드의 겨울은 아이러니하다. 비가 오고 흐린 날이 많아 우울하지만 일단 비가 걷히고 해가 나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여름의 녹음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잔디도 여전히 푸르고, 녹색 잎사귀들을 매달고 있는 나무도 제법 많다. 그리고 이렇게 조금만 차를 타고 나오면 그 초록빛 세상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실 때 피할 길도 함께 내신다. 나갈 듯하다 얄밉게 다시 달라붙는 감기도, 매년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아일랜드의 윈터블루스도 견뎌낼 힘을 주신 것이다. 어쨌든, 봄이 오래 남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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