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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19. 2017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

 나의 그리스친구 '마리아 타르소울리(Maria Tarsouli)'

'딩동'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마리아의 남편 바실이 마리아가 왓츠앱에 만든 '베이비'방에 남긴 메시지였다. '오늘 새벽에 병원에 와서 대기하다가 지금 곧 분만실로 들어갑니다!' 6일이 예정일이었는데 열흘이나 늑장을 부리다 이제 드디어 세상 구경을 하러 나서려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를 알고 지낸 지 벌써 6년이 되었다. 2010년 3월 어학연수생으로 처음 아일랜드에 발 딛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동동대던 와중 찾아간 데스티니 교회에 그녀가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데다 영어가 지금만큼 자유롭지 않을 때라, 한동안 사라진 줄 알았던 선천적 낯가림과 수줍음이 극대화되었을 때다. 나보다도 더 작고 아담한 체구에 흰 피부, 초록색 눈동자와 당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가 내 앞줄 왼쪽에 앉아 있었다. 아일랜드 교회들은 보통 예배 전후로 티타임을 갖는다. 서로 밀린 얘기를 떠들썩하게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한다. 예배 전에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기다리고 예배 후에는 바쁘게 모임별로 흩어지는 한국 교회에 비해 좀더 자유분방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낯설음을 피해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나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안녕! 난 마리아야. 넌?" 그리고는 내 국적을 묻고, 데스티니 교회에 처음 왔는지를 물었다. 그렇게 첫날 처음으로 마리아와 얼굴을 텄지만 사실 그녀와 지금처럼 친해질 줄은 몰랐다. 그녀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사적이고 말을 아끼는 스타일이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일요일 오전 교회에서만 얼굴을 봤는데, 어떤 날은 한없이 친절하다가도 어떤 날은 차가우리만치 표정이 없고 조용했다. 어쩌면 나 못지않게 예민하고 감성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녀를 좀더 알아갈 기회가 생겼다. 화요일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마리아도 늘 그곳에 있었다. 함께 20분 정도 찬양을 한 후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 성경공부를 했는데 마리아도 나와 같은 그룹이었다. 아무래도 소그룹이다 보니 그룹 내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가 더 열려 있었다. 겉도는 인사뿐 아니라 사적인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시티센터에 있는 교회였기에 학생 비율이 높고 국적도 다양했다. 그래서 아이리쉬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아이리쉬스럽지 않았다. 나말고도 영어가 부족한 사람도 많아 부담감이 덜했고, 나처럼 어학연수를 위해 온 아이들과 이런저런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리스인이지만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글라스고에서 대학을 나왔고, 이후로 죽 아일랜드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어 수준은 물론 아일랜드의 모든 것에 아주 익숙해 보였다. 푸른 지중해와 태양을 떠나 비바람과 사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그녀가 아테네 출신이고 글라스고에서 건축을 전공했다는 것, 딸 둘 중 맏이고 그리스정교회 가정에서 혼자 신교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현재 디자인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전공인 건축설계 쪽으로 직장을 옮기고 싶다며 그룹원들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 주 화요일 늦은 오후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라프튼 스트리트를 지나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돌아보니 마리아였다. 그렇게 뜻밖에 마주치니 배로 반가웠다. 그녀는 퇴근길에 다음날 회사일에 필요한 물건을 몇 가지 사러가는 참이라 했다. 나는 존과 데이트하던 시절이라 존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약속시간까지 여유가 있었으므로 마리아와 얘기도 나눌 겸 쇼핑센터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참, 나 새 직장 구했어! 바라던대로 건축설계를 하게 됐어. 이번주까지 지금 회사 마무리하고 담주부터 새 회사로 출근이야. 기도해줘서 고마워..." 마리아는 새 사무실이 시티센터에 있다며 나 시간 될 때 점심 같이 먹자고 했다. 외국에 살다보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는 많지만 마음속까지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친구'를 사귀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좋은 친구를 얻기 위해선 용기내어 붙잡아야 하는 어떤 기회들이 있는데, 마리아가 스쳐가듯 던진 점심 제안이 내겐 그런 것이었다. 마리아가 새 직장으로 옮긴 주, 축하메시지와 함께 점심을 함께 먹고싶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주 금요일, 마리아의 회사 근처에 있는 이탈리언 카페에서 만났다. 아일랜드에 있는 누군가에게 존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우리 관계는 이미 꽤 진지했지만 한국에 있는 부모님 두분 모두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다. 마리아는 나와 존의 관계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했다. 마리아가 "기도해줄게"라고 말했을 때, 난 그동안 내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 친구'를 찾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옳은 길을 찾기 위해 애쓸 때나 마음이 어려울 때,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해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고마워, 마리아! 한국에 있을 때는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믿음의 친구들이 늘 주변에 있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아직 찾지 못해 얼마나 외로웠는지 몰라." 마리아가 소리없이, 하지만 커다란 미소로 나를 향해 웃었다. 이듬해 극적으로 부모님이 허락해 주시면서 존과 나는 결혼에 골인했다. 레지스트리 오피스에서 우리끼리 선서하고 끝낸 초간단 결혼식이었다. 나의 다사다난한 결혼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리아가 누구보다도 많이 축하해주었다. 2년 후 어느날 그녀는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데이트하는 남자가 있노라 고백했다. 건실한 그리스남자인데 아직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다며 기도를 부탁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마리아는 그 남자 '바실'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올린 성대한 그리스정교식 결혼식에는 초대를 받고도 아쉽게 못갔지만 아일랜드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준비한 데스티니 교회에서의 결혼식에는 존과 함께 참석했다. 존은 교회 찬양팀 친구들과 축하연주를 맡았고, 솜씨 좋은 친구들이 직접 만들어온 음식이나 케이크로 작은 테이블 위에 멋진 잔칫상이 차려졌다. 건장하고 차분한 성격의 바실과 아담하고 발랄한 마리아. 결혼 후 처음 점심약속으로 만난 마리아는 아주 많이 행복해 보였다. 그날따라 유난히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빠가 쓰러지셔서 1년 넘게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계시다 돌아가시기까지 내가 힘들고 아픈 시간을 지나는 동안 마리아는 늘 기도친구로 내 곁을 지켜주었다. 지난해 형부가 암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말할 수 있었던 친구도 그녀다. 존과 나는 김치를 좋아한다는 마리아와 바실을 한국음식점에 데리고 갔다. 두 사람은 불고기비빕밤과 제육볶음을 깨끗이 비워냈다. 바실이 출장가고 없는 어느날엔 마리아의 집에서 함께 올리브와 페타치즈를 듬뿍 넣은 그릭샐러드를 만들어 먹으며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한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아일랜드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자기나라로 돌아간 후 마음이 허전할 때도 마리아는 늘 그곳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우리의 단골 카페 '버나드쇼'에서 임신소식을 전했을 때, 난 거의 울 뻔 했다. 그녀의 오랜 기다림을 알았기에 진심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2016년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한국과 호주에서 보내고 아일랜드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친구도 그녀였다. 배가 제법 부른 마리아를 '버나드쇼'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나와 존을 '베이비샤워'에 초대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 미리 새 가족의 탄생을 축하하고 축복하는 파티지만, 꼼짝없이 아기에 메이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기회이자 육아에 필요한 물품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는 현실적 이유에서도 젊은 커플들 사이에 유행을 타는 듯하다. 초대카드에 '선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일회용 기저귀 사다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보니 기저귀값이 부담스러운 건 여기도 똑같은 모양이다. 베이비샤워는 2주 뒤 토요일이었다. 라스마인에 있는 마리아의 아파트는 벽면을 장식한 파랑과 하양 풍선들, 갖가지 초콜렛과 비스킷이 담겨 있는 상자, 와인과 위스키를 비롯한 각종 음료수, 초대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온 다양한 음식과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처음 보는 얼굴들과 낯익은 얼굴들이 모두 마리아와 바실을 축하해 주기 위해 그곳에 있었고, 만삭의 몸으로 안주인 노릇을 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마리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행복한 모습의 마리아와 바실

'딩동!' 몇 시간 뒤 왓츠앱 '베이비'방에 다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조금 전 12시 26분에 건강한 사내아기 출산했어. 모두들 기도해줘서 고마워!' 마리아가 직접 남긴 메시지였다.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의 사진 한장. 머리가 벌써 가뭇하게 자라난 건강한 사내아이의 커다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가장 좋아하는 내 친구가 엄마가 되었다. 이제 예전처럼 그녀를 자주 만나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조카 채환이가 태어나고 친언니와 더 친해졌던 것처럼, 왠지 마리아랑은 자매처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리스의 푸른 지중해를 닮은 건강한 아기를 빨리 만나보고 싶다. 무엇보다 내 삶이 아일랜드에 뿌리 내릴 수 있게 도와준 그녀와 나의 값진 우정을 위해 축배를 들고픈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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