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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Apr 28. 2017

당신의 꿈이 회귀하는 어떤 집

아이리쉬 작가 메브 브래넌(Maeve Brennan)'의 흔적을 좇아

몇 해 전 존과 함께 연극을 한 편 보러 갔다. <메브의 집>(Maeve's house)이라는 일인극이었다. 영국 웨스트우드의 뮤지컬이나 사무엘베게트처럼 잘 알려진 작가의 클래식한 작품도 아니고, 이름도 처음 듣는 원로배우 이먼 모리세이(Eamon Morrissey)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기한다는 일인극이었다. 분명 내가 고르고 내가 표를 예매했는데, 그땐 그 연극의 어떤 점에 끌려서 보고 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비극장(Abbey Theatre)에 딸린 피콕소극장에서 하는 공연이라 그냥 믿고 예매하지 않았었나 싶다. 어쨌든 연극은 기대보다 아주 재밌었다. 배우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옛날얘기 들려주듯 조곤조곤 독백으로 풀어나갔는데, 그 이야기의 첫 실마리는 자신이 살았던 집이었다.

"1966년 어느날 뉴욕의 지하철 안에서 <더 뉴요커>를 읽고 있었어. 뉴욕에 정착한 지 오래 되지 않았을 때였지. 거기 아이리쉬 출신 작가 '메브 브래넌'의 칼럼이 실려 있었는데, 메브가 어릴 때 살았던 더블린의 집에 대해 묘사한 대목을 읽다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어. 체리필드에비뉴 48번지! 메브가 살았던 집이 다름아닌 내가 뉴욕으로 이주하기 전에 살았던 바로 그 집이었던 거야!"


"라넬라!" 존이 팔꿈치로 나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게다가 체리빌에비뉴면 네가 살았던 집이랑 아주 가까운 걸...!"


존과 결혼하기 전 라넬라의 작은 원룸에서 혼자 두 달을 살았더랬다. 학생비자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때까지 남은 2개월은 돈이 좀 들더라도 내가 늘 마음에 품고있던 동네에서 쉐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 꿈의 동네가 바로 라넬라(Ranelagh)였다. 더블린 강남지역에 위치한 라넬라는 안전하고 교통이 편리할 뿐 아니라, 예술적인 세련됨과 옛것의 우아함이 공존하는 동네다.

짧지만 2년간의 아일랜드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학원 과정을 모두 마친 후라 매일매일이 오자유의 시간이었고, 존과의 연애도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내 방은 2층짜리 조지안 하우스의 1층 뒷마당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침이면 마당의 나무들에 찾아드는 새들의 지저귐이 요란했다. 휴대폰 알람 대신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을 깬다는 건 서울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낭만이었다.

이먼은 메브처럼 어린시절 아일랜드에서 보내고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도, 1940~1960년대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떠났던 아이리쉬들의 거대한 이주물결 속에 있었던 듯하다. 1934년, 미국 워싱턴에 아이리쉬대사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정착한 메브 브레넌은 당시 뉴욕의 저명한 잡지 <더 뉴요커>의 칼럼니스트이자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먼은 메브의 글속에 묘사된 라넬라의 집과 그녀의 삶, 그리고 어떤 시점에서 중첩되는 자신의 기억 속 라넬라의 집과 이주예술가로서의 삶을 극의 주 재료로 엮어나간다. 연극을 보고온 날 밤, 존은 자기 전 '메브 브래넌'이란 이름을 넣어 열심히 구글링을 해댔다. "와...삶이 진짜 영화 같네. 봐봐, 이렇게 매력 있고 재능 많은 여자가 말년에는 정신병과 우울증을 앓으며 외롭게 죽었대." 존이 보여준 흑백사진 속의 메브는 젊은 시절의 오드리헵번과 흡사했다. 깡마르고 가녀린 몸매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예민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패션지 <바자(Bazaar)>에도 글을 썼다는 이력답게 사진마다 패션리더의 아우라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그녀의 화려한 외모와 이력 이면에는 '알콜중독자 남편'과 '이혼', '잡지사빌딩 화장실을 잠자리 삼아 전전하며 노숙자로 떠돌았던 말년'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 이 극적인 삶을 살았던 아이리쉬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던 어느날, 존이 '깜짝선물'이라며 내 앞에 책 한권을 불쑥 내밀었다. 메브 브래넌의 <애정의 봄날들>(The Springs of Affection). 그녀의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 메브가 <더 뉴요커>에 기고했던 짧은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 책을 통해 만난 메브 브래넌과 그녀의 집 다음날 나는 그 낯선 책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레 열어 탐험을 시작했다. <큰 화재 후의 아침>(The Morning after the Big Fire)은 그녀의 어린시절 기억 속에 있는 라넬라 집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다섯 살때부터 열여덟이 거의 될 때까지 더블린 라넬라에 있는 작은 집에 살았다. 그 길을 따라 늘어선 집들은 모두 붉은 벽돌집이었고 집마다 작은 뒷마당이 딸려 있었다. 뒷마당의 반은 시멘트 바닥, 반은 잔디밭이었는데 그 사이에는 낮은 돌담이 있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내 키가 너무 작아 돌담 너머를 볼 수 없었는데 몇 년 지나면서는 꽤 쉬웠다고 기억난다. 담 높이는 아마 5피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이 돌담은 정원에서 정원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공동담벽으로 그 길 끝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녀의 집 정원으로 이어지는 담장 너머에는 커다란 테니스클럽이 있었는데 메브는 여동생과 그곳에 담장 끝에 서서 사람들이 테니스 치는 모습을 구경하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집과 테니스클럽 사이에 주유소 때문에 시야가 가려 제대로 보긴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날 밤 주유소에 큰 불이 난다. 주유소는 잿더미가 되고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하룻밤새 닥친 재앙에 망연자실하지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에 매료된 소녀는 다음날 아침 그 소식을 아직 알지못하는 동네사람들에게 자신이 독점한 특종을 전하며 영웅이 된 듯한 흥분을 맛본다. 그리고 비참한 몰골로 주저앉아 있는 주유소 옆, 운좋게 화재를 비켜간 테니스클럽에는 전날과 다름없이 말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여가를 즐긴다. 아이러니한 우리네 삶의 풍경과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 보았을 '길티플래저(Guilty Pleasure)'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적나라하면서도 흡입력 있다.

이 소설을 포함해 처음 7개의 짧은 이이기는 매우 자전적이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 '메브'를 주인공 이름으로 쓴 글도 있다. 집에 찾아온 사과장수를 거절하지 못하고 사과를 산 엄마가 매일 찾아오는 사과장수를 피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어린 딸의 시선으로 그린 <바다의 노인>(The Old Man of The Sea). 여기서 어린 딸은 바로 메브 자신이다.

이어지는 다섯 편의 이야기는 허버트와 로즈 부부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로즈는 사사건건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깎아내리는 남편이 두렵고, 허버트는 아내가 대문에 들어설 때 자신이 미소짓는다는 사실의 허위를 혐오스럽게 느낀다. 게다가 하나뿐인 아들은 단지 부모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신부가 되려고 한다. 깨어진 가족관계와 그로 인한 숨막히는 일상이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는데, 어둡고 쓸쓸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정제된 문장들은 씹을수록 맛깔나고 울림은 깊이 있다. 원서로 문학작품을 읽을 때 부딪히는 문학적 표현과 문화적 이해의 장벽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글은 가슴뛰게 아름다웠다. 심플하면서도 우아하고, 예리하면서도 따뜻했다.


- 메브 브래넌'의 옛집을 찾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오가며 읽을 거리를 찾아 책장을 두리번거리다가 메브 브래넌의 책 <더 스프링스 오브 어팩션>의 초록색 책등 위에 눈길이 멈췄다. 한창 이 책에 빠져 열심히 읽어내려가다 마지막 이야기 한 개 정도를 남겨뒀던 기억이 났다. 책을 꺼내 펼쳐보니 읽은 부분을 표시하려고 사이에 끼어두었던 티슈가 그대로 있다. 남은 이야기는 바로 책 제목이기도 한 <더 스프링스 오브 어팩션>.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가방 안에 넣었다. 더블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책을 꺼내 읽는 동안, 잊고 있었던 라넬라의 집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결혼 5년차에 접어든 우리 부부에게 내가 살았던 라넬라 집은 가장 알콩달콩했던 연애시절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낡고 삐걱대는 싱글침대에 나란히 앉아 내가 난생처음 만들어본 스파게티를 함께 먹은 일, 빨간 나무대문 앞에서 헤어짐이 아쉬워 긴 키스를 나눴던 일... 내가 살았던 2층짜리 조지안하우스에는 내 원룸을 포함해 방이 4개 있었다. 세입자들은 같은 대문으로 들어와 각자 자기 방(겸 집)으로 흩어지는 형태였다. 건물이 오래 되면 내부를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 주인할머니는 옛날 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었다. 집세는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 매주 월요일 아침까지 복도에 놓인 나무상자 안에 넣어야 했고,더운물이나 전기를 쓰려면 먼저 복도에 있는 기계에 2유로짜리 코인을 넣어야 했다. 하루 2유로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크레딧이 애매하게 부족할 때가 종종 있었다. 샤워를 조금 오래하다가 비누거품을 다 씻어내기도 전에 더운물이 끊겨 남은 생수로 마무리했던 적도 있다. 그래도 혼자 쓰는 싱크대와 작은 가스버너, 뒷정원으로 나가야 하지만 혼자 쓰는 화장실이 있어 얼마나 좋았던지. 그날 저녁 존에게 메브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살았던 집이 보고싶다는 이야기도. 존이 즉흥적인 제안을 했다. "그럼 이번 주말에 라넬라에 가자. 네가 살았던 집도 가보고 메브가 살았던 집도 찾아보자구!" 그리고 찾아온 토요일, 우리는 점심을 먹고 라넬라로 차를 몰았다. 내가 살았던 빨간 대문 집은 몇 년 전과 하나도 변함 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내 방에는 내가 쓰던 낡은 싱글침대와 작은 나무스탠드가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허리가 동그랗게 굽은 집주인 할머니는 여전히 월요일 아침마다 집세가 들어있는 봉투를 수거하러 잰걸음을 하고 있겠지...


메브의 집은 내가 살던 라넬라 집에서 겨우 세 블럭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체리필드에비뉴 48번지. 메브가 '붉은 벽돌집'으로 묘사한 그 집은 어떤 새 주인에 의해 핑크색 페인트로 덧칠되어 있었다. 나는 48이라는 숫자가 적힌 파란 대문 앞에 서서 그녀가 매일 지나다녔을 체리필드에비뉴 거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였던 메브의 아버지 로버트 브래넌(Robert Brennan)이 영국경찰을 피해 이집 저집으로 도망다니며 숨어지냈던 당시, 메브와 그 가족들의 삶을 상상했다. 영국군인들이 들이닥쳐 어머니가 방금 말끔하게 청소한 공간을 쓰레기장처럼 뒤집어놓고 갈 때마다 그 폭탄의 잔해 같은 공간에서 흐느껴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목도해야 했지만, 그밖의 시간 속에서는 그녀만의 소소한 일상이 흘렀을 것이다. 어쩌면 라넬라의 집은 그녀에게 늘 긴장감이 감돌지만 유일하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기다림과 희망의 장소였을 것이다. 그리고 열일곱에 미국으로 떠난 이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 때마다 소환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신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마치 혀가 이 빠진 자리를 자꾸만 찾아가듯, 브래넌의 상상력은 강박적이다시피 같은 공간으로 회귀한다. 동일한 장소로 보이는 그 집들에서 그녀는 봉인되었던 작은 상처들과 희미한 기쁨들, 이루지 못한 꿈들을 되살려낸다.' - 미국작가 제이 파리니(Jay Parini), <뉴욕타임즈> 7년째 고국을 떠나 아일랜드라는 외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메브처럼 끊임없이 회귀하게 되는 공간, 마음속의 집은 어디일까? 지금 살고 있는 브레이의 아파트? 결혼 전 한국에서 혼자 살았던 홍대의 오피스텔? 한국에 갈 때마다 묵는 친정엄마의 집? 아니면 여행을 하면서 머물었던 어떤 집들? 글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에게 그런 집은 실재하지 않는 어떤 무형의 공간일런지도. 어쨌든 오늘 밤은 남편과 함께 브레이의 집으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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