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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n 06. 2017

아일랜드 채식인들의 잔치 'Cork Vegefest'

아일랜드에 부는 Veganism의 바람

봄비다. 매일같이 비가 올 땐 그냥 지겹더니, 며칠 날씨가 좋다가 비가 오니까 실망스럽기보다 오히려 '봄비'의 감흥이 스멀거려 좋다. 아니, '여름비'인가?(아일랜드에서는 5월을 여름이라 부른다. 하지만 기온은 초봄의 것)
코크(Cork)로의 혼자여행. 코크에서 열리는 채식축제 'Cork Vegfest'에 가기 위해서다. 아일랜드에도 매년 지역마다 다양한 음식축제가 열리지만, 비건(Vegan: 완전채식인)만을 위한 축제는 'Cork Vegfest'와 그 후속버전인 'Dublin Vegfest'뿐이다. 그래서 늘 궁금하고 가고싶었던 축제. 육식주의자인 존과 함께 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토요일 쉬프트가 걸려 못가게 됐다.
단 하룻밤인데도 존이랑 헤어지려니 어쩐지 슬펐다. "오늘밤 혼자 자야되네"라며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도 나랑 같은 맘. 물론 막상 밤이 되면 오랜만에 각자 보내는 시간의 달콤쌉싸름한 자유를 맛보겠지만, 아직 우리가 이런 마음이라 좋았다.

원래는 오전에 스페인어 수업이 있는 날이라 끝나는 시간 맞춰서 오후4시 기차를 예약했는데, 롤라가 갑자기 수업을 취소하는 바람에 낮시간이 비어버렸다. 좀더 일찍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좋으련만 제일 싼 표를 샀더니 교환도 못한다. 일단 세면도구와 잠옷바지 등 하룻밤 외박을 위해 꾸린 간단한 베낭을 메고 나와 더블린 시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유희열이 새로운 JTBC 예능프로 촬영 차 그라프튼 스트릿에서 버스킹을 한다는 날이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버스킹하는 정확한 시간도 모르는데다 혹시 취소됐을지도 모르는데 빗속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만큼 왕팬은 아니었으므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휴스턴기차역으로 향했다. 유희열의 첫방송이 대박나서 한국관광객이 아일랜드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 나는 좋을까 싫을까. 왠지 그리 좋기만할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비밀아지트 같은 장소가 인기가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면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거랑 비슷한 심보(?)인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나만 알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어쨌든 유희열의 목소리와 노래가 그라프튼 스트리트에 울려퍼지는 상상은 즐거웠다.

오후4시 정각에 휴스턴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6시30분에 코크켄트역에 닿았다. 좌석이 반 정도밖에 차지 않아 조용하고 여유로운 여정이었다. 난 복도석을 예약했는데 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 창가에 있는 전기콘센트도, 창문을 스쳐 지나가는 빗방울들의 춤사위와 비에 젖은 초록빛 시골풍경도 모두 내 차지였다. 7월에 열리는 '골웨이 아트페스티벌' 프로그램을 검색하다 발견한 아이리쉬 뮤지션 '게빈 제임스(Gavin James)'의 노래 <For You>는 '비오는 날의 기차여행'과 싱크로율 100%. 오랜만에 사춘기소녀같은 감상에 젖어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코크에서의 첫날밤은 코크시내 구시가지의 오래된 호스텔에서 애플사이다 한캔을 곁들여 네플릭스를 감상하다 잠들었다. 먼지 풀풀 나는 옥탑방이지만 도미토리가 아니라 화장실 딸린 싱글룸이라 무한히 감사했다. 늦게까지 방불을 켜놓고 영화를 보며 화장실을 속옷바람으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큰 사치인지, 베낭여행에 익숙한 가난한 여행자들은 안다.
아이리쉬 애플사이다 한캔, 네플릭스 영화, 창밖의 빗소리와 함께 밤이 졌다.


원래 아침형 인간이기도 하지만 여행 중에는 더 발딱 잠이 깬다. 여럿이 방과 화장실을 나눠쓰는 호스텔에 묶으며 생긴 버릇이기도 하다. 화장실 붐비는 시간을 피해 제일 먼저 샤워하고 볼일 보고 밥 먹고 튀어나가는 거다.
아직 아무도 없는 식당. 벽에 걸린 티비에서 뉴스앵커의 바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료로 제공되는 토스트와 커피에 어제 챙겨놓은 사과를 함께 아침으로 먹고, 어제 호스텔에 왔던 모습 그대로 다시 거리로 나선다.

<코크 베지페스트>가 열리는 코크 시청 앞에는 벌써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었다. 10시에 오픈이니 아직 15분이나 남았는데 대단들하다. 그것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 아래.
예상은 했지만 역시 히피 포스가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다. '채식'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겠지만 히피들이 추구하는 자연주의적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리고 온 아이들까지 히피패션이다. 나도 이제 채식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고 수많은 호기심의 시선에 대한 내 나름의 이유와 대답을 준비하고 있지만, 성장기 아이들의 채식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고 비건육아를 고집하는 부모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적으로 채식인구가 꾸준히 늘면서 '채식'에 대한 인식도 예전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다. 별도의 채식메뉴를 갖춘 식당들은 물론, 베지테리언(채식) 또는 비건(완전채식) 식당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종종 점심을 먹으러가는 채식식당 '코누코피아'와 테이크아웃 샐러드바 '블레이징 샐러드'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고, 새로 생긴 비건식당 '소바부처'는 연일 잡지에 오르내린다. 어쨌든 철학적인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나로서는 식당 선택이 폭이 넓어졌을 뿐 아니라 웨이터 눈치를 보며 특별메뉴를 부탁해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건물의 고풍스런 모습에 비해 행사가 열리는 내부는 소박하고 가족적이었다. 음식뿐 아니라 비누를 비롯한 각종 세제와 향수, 화장품 등 천연성분으로 만든 친환경적인 비건제품들이 다양하게 선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코크지역에 기반을 둔 로컬기업과 개인, 시민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하고 연합하여 즐기는 축제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설겆이용, 빨래용 두 가지의 천연세제를 조금씩 사고, 저녁 때 집에 가서 존과 나눠 먹으려고 퍼피씨드(양귀비씨)가 콕콕 박힌 레몬케이크를 한조각 샀다.

점심때는 일부러 제일 긴 줄에 합류했다.(줄이 길다는 건 뭔가 있는 집일 거라는 믿음!) 긴 기다림 끝에 두툼하고 따끈한 렌틸콩 버거를 손에 넣은 나는 이벤트홀 한켠, 이미 한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에 남은 의자 하나를 빚져 엉덩이를 걸쳤다. 현미와 렌틸콩을 잘게 부수어 둥글게 구워낸 패티에 신선한 토마토와 양상치를 얹고 두유로 만든 살사마요를 살짝 뿌린 버거는 구수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뒷맛이 산뜻했다. 후식으로는 진한 커피 한잔에 샘플로 얻은 생초콜릿 한조각. 채식의 장점 중 하나는 이렇게 든든하게 먹어도 속이 부대끼지 않는다는 거다. 곁얘기지만, 채식을 결심했다면 다이어트 따위가 아닌 균형 잡힌 영양섭취에 가장 신경써야 한다. ´비거니즘(Veganism)'은 '플랜트베이스트(Plant-based) 다이어트'를 기본으로 한다. 땅에서 자연에너지를 가득 품고 자라난 채소와 과일, 곡류의 영양분을 되도록 가공하지 않고 섭취하자는 것. 즉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대신 감자튀김과 콜라만 먹는다고 채식이 아니란 소리다.


배도 부르고, 몇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었더니 피곤도 했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 아직도 빗줄기가 굵다. 슬슬 다시 코크 켄트 기차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 얼룩이 채 다 마르지 않은 검정레인부츠 위로 다시 빗방울들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1박2일의 빗속여행, 톡톡히 역할을 해낸 나의 레인부츠에게 칭찬을. 이제 2시간 반 기차를 타고 더블린으로, 더블린에서 다트를 타고 던리어리로 가면, 해가 어스름한 항구 곁에서 존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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