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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Jul 08. 2017

검둥개 '블래키'의 비밀

아일랜드에는 검둥개가 산다

1. 내 별명은 블랙독, 해석하면 '검둥개'다. 비록 우윳빛깔 피부가 수많은 여행의 흔적으로 가무잡잡하게 변해버렸지만 그래서 블랙독이 된 건 아니다.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때는 서로 별명을 지어 부르는 게 하나의 놀이였던 것 같다. 초등학생 수준이 그렇지, 주로 외모를 빗대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니가 튀어나오거나 얼굴이 희면 '토끼', 뚱뚱하면 '돼지', 키가 작으면 '땅콩', 이마가 넓다고 '운동장' 등등. 심지어 성이 '고'씨라고 '고구마', 이름 첫자가 '현'이라서 '현미경' 등 이름만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난 초등학교 때 이렇다할 별명이 없었다. 그땐 워낙 키도 작은 데다 성격도 조용해서 주로 별병을 지어주는 장난꾸러기들 눈에 잘 띄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사실 속으로는 나도 별명을 하나쯤 가지고 싶었다. 아주 괘씸한 별명만 아니라면야, 남에게 관심을 더 받고 싶은 심리는 자연스러운 거니까. 하지만 별명이란 게 남이 지어서 불러줘야 별명이지, 내가 지어서 불러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던 내게 아주 늦되게, 남들은 별명에서 벗어날 시기인 고등학교 졸업 무렵, 별명이 생겼다. 근데 그게 남들이 불러주기 시작한 게 아니라 내가 남들에게 '별명'으로 소개한 이름이 진짜 '별명'이 되었달까.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그리고 같은 동네미술학원), 같은 학교, 같은 교회에서 자란 동갑내기 친구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질기고 아프게 좋아했다.(그 이후로는 한번도 짝사랑을 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 생길라치면 싹부터 잘라냈다.) 불행히도 여자애들한테 아주 인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맘때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꽃미남 외모에 노래와 기타, 그림 등 예술적인 재능까지 넘쳤다. 우린 꽤 친하게 지냈지만 한번도 친구 이상은 아니었다.(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것만큼 괴로운 '희망고문'도 없다.) 안 그러려 해도 무너지는 자존감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성적도 점점 떨어졌다. 부모님의 기대에는 많이 못미쳤지만 서울 안 4년제 대학에 붙었다. 예고를 포기하면서 일찌감치 미술을 접은 나와 달리 그앤 계속 미술공부를 했는데 지원한 미대에 떨어졌다. 재수를 한다고 했다. 그애보다 먼저 고등학교 입시지옥을 뚫고 '자유와 낭만'의 세계에 발을 딛고 나니, 이제 그만 지난한 짝사랑을 정리하고 싶은 욕구와 결심이 불타올랐다. 난생처음 과팅, 미팅, 소개팅이란 걸 해봤다. 또 난생처음 걸쭉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타지방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도서관이 아닌 술집에서 자정을 맞았다. 모든 것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는 환경의 변화는 그애가 아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의 가슴아픈 첫사랑은 그렇게 서서히 통증을 멈췄다.

대학 입학 후 두어달쯤 지나 그애를 교회에서 마주쳤다. 시험결과에 대한 실망을 극복하고 재수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 밝은 모습이었다. "대학 가더니 예뻐졌다?" 그애가 농담처럼 건넨 한 마디 칭찬에 제법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대수롭지 않은 척 할 말을 찾고 있는데 그애가 불쑥 샛노랑색 편지봉투를 건넸다. "그동안 네가 준 선물이랑 편지들 모두 고마웠다." 내가 자기를 향한 관심을 멈추려고 노력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순간, 이렇게 내 첫사랑의 대단원이 마무리되는가 싶어 기분이 묘해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편지를 펼쳤다. 그애의 단정하고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와르르 눈속에 들어왔다.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그림 그리는 사람답게 직접 노란색지를 잘라 만든 편지지 중앙에 그애가 예쁘게 디자인한 한자 두자가 박혀 있었다. 현구. 검을 현, 개 구. 원래 내 이름의 한자 뜻은 밝을 현, 옥돌 구인데 그애가 재치있게 바꿔 넣은 거다. '현구야. 생각해 보니 그동안 너한테 받기만 하고 한번도 뭘 준 적이 없더라. 겨우 편지 한장이지만 그동안 네가 준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어. 대학생활 즐겁게 잘 하고 멋있는 남자친구도 하나 만들어. 난 네 이름이 좋아, 검둥개 현구.' 그 이후로 누가 내 이름의 한자 뜻을 물어보면 '검둥개'라고 말했다.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기 시작하니 '사실은 아니'라고 말하기에 늦어버렸다. 처음으로 컴퓨터란 게 생겼다. 메일계정, 인터넷카페나 클럽의 닉네임 모두 '블랙독'으로 신청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20여년이 지난 어느날, 더블린의 어느 거리에서 존이란 남자를 마주쳤을 때 난 그에게 비밀스레 나의 별명을 알려줬다. 그가 재밌는 별명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헤이, 블랙독! 그럼 '블래키'라고 부르면 되겠네!!"



2.

아일랜드에는 개가 정말 많다. 어쩔 땐 길에서 만나는 개의 수가 사람 수를 맞먹을 때도 있다. 아이리쉬들이 워낙 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주거형태가 아파트보다는 마당 딸린 조지안하우스가 일반적이라 개를 키우기 쉬운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여럿 낳는 사회적 분위기처럼 개도 여러 마리씩 키운다. 종류 불문하고 개가 많기도 하지만, 대형견, 그중에서도 '래브라도'의 인기는 가히 압도적이다. '순하고 똑똑하고 충성심 높은' 종자로, 사람으로치면 머리와 성격 모두 좋고 신의까지 깊다는 뜻이니 녀석의 덩치를 감당할 수만 있다면 반려견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유난히 까만 개가 많다! 사실 아일랜드에 와서 느낀 첫인상 중 하나가 '아일랜드 사람들은 검정색 개를 엄청 좋아하는구나'였다. 여기도 검둥개, 저기도 검둥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검정색을 불길하다고 생각해선지 검정색 동물을 꺼려하는 정서가 있는데 이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검둥개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어쨌든 길에서 검둥개를 마주치면 나는 분신을 만난 듯 반갑다. 사실 지나가다 검둥개를 발견할 때마다 나보다 더 흥분하는 건 존이다. 절대 그냥 지나치지를 못한다. 원래 나 못지않게 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를 '블래키'라고 부르면서부터는 나와 개를 거의 동일시하는 것 같다.

"저기저기 검둥개 있다, 봐봐 봐봐!" 운전 중일 때는 클락숀을 울리고, 길을 걷고 있을 때는 멈춰서서 주인에게 개의 이름을 물어보고 머리라도 몇 번 쓰다듬어줘야 가던 길을 간다. 자기 혼자 있을 때 검둥개를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왓츠앱'으로 보낸다. 그러더니 언젠가부터 나에게 어떤 말을 할 때 개의 행동이나 습성에 비유한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둘이 분위기 좋을 때, 애정을 담은 농담으로 하는 말들이다. 아침에 출근 준비하면서 '버터 좀 냉장고에 넣어줘', '전자렌지 코드 좀 뽑아줘' 이것저것 부탁할 때 하는 말 : "너 왜 '왈왈'거려! 덩치도 쪼그만 개가 지금 나 물어보겠다고 그러는 거야?" 아침에 좀 여유가 있을 때 아침밥 먹고 다시 침대에 기어들어간 나를 보고 하는 말 : "햇볕 쬐며 마당에 늘어져있는 래브라도처럼 누워 있네!" 내가 저지른 악의 없는 실수들 후에 나를 안아주며 하는 말 : "블래키! 너 종종 말썽을 피긴 해도 참 사랑스런 개야. 히히..." 재밌는 건, 그가 나에게 개와 관련된 표현을 할 때마다 내가 정말 순하고 사랑스러운 까만색 래브라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거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머릿속에 어떤 검둥개의 이미지들은 실재하는 양 선명하게 떠오르고 어느덧 내 가슴속에서는 마치 영화를 보듯 수많은 이야기 장면들이 펼쳐진다. 그런 상상 속에서 나는 문득 나를 먼저 챙겨주기 바랐던 이기적인 마음, 그의 약한 모습을 탓했던 마음들이 미안해지고, 아무런 조건 없이 주인이 원하는 곳을 함께 가주고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래브라도처럼 존에게 조금 더 미련하게 따뜻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싶어진다. 어느날 밤 존이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내 오른팔을 자기 가슴 위로 끌어다 얹으며 말했다. "작은 래브라도 앞발처럼 따뜻해" 언젠가 우리 희망대로 진짜 '블래키'를 가족으로 맞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하며 난 그의 푹신한 배 위에 내 두발을 올렸다. "자, 뒷발은 어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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