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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Aug 29. 2018

아이리쉬 집밥, ‘카보리(Cavery Food)’

집밥이 그리울 때, 난 카보리를 먹으러 간다

외국살이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그리운 음식은 뭐니 뭐니 해도 엄마음식, 즉 ‘집밥‘이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에서는 먹기 힘든 곤드레밥이나 취나물, 비름나물, 시래기나물 등 산나물류의 슴벅슴벅한 질감, 쌉싸래한 향기에 대한 기억은 늘 향수병을 자극한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아일랜드 음식이 그리워지는 날이 왔다. 존과 떨어져 한국에서 보낸 세 달 동안 존이 보낸 아일랜드 음식 사진을 보는데 갑자기 파슬파슬 분이 나는 아일랜드 감자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지는 거다. ‘음식‘이란 이처럼 먹는 행위를 넘어 어떤 정서적 기억, 혹은 관계적 맥락과 더 깊이 닿아있다는 걸 종종 느낀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정착해서 살아간다는 건 그 나라의 음식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그 나라의 문화와 관습이 내 정서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 혹은 한국에서 오래 머물다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다 돌아왔을 때, 존과 나는 카보리 음식을 먹으러 간다. 여행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우리만의 의식이랄까. 단순하고 투박한 요리지만 그래서 더 정다운, 집에서 먹는 집밥 같은 음식은 누군가 나를 따뜻하게 배웅해주고 가식 없이 환영해주는 느낌을 준다. 

펍이나 호텔 레스토랑의 벽이나 문 앞에 놓인 알림판에 ‘카버리(Cavery)’라는 단어가 있다면 아이리쉬 전통음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보통은 점심식사로 제공되며 음식은 그날의 메뉴에 따라 미리 조리해 둔다. 카버리(Cavery) 메인요리는 주로 쉐퍼드 파이, 아이리쉬 스튜, 칠면조나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구이, 그날의 생선요리 중 몇 가지로 구성되고, 기본으로 곁들여지는 야채는 대체로 삶은 당근과 파스닙, 완두콩, 양배추, 굽거나 으깬 감자가 나온다. 한 마디로 ‘아이리쉬 집밥‘이다. 따뜻한 국물이 당긴다면 아쉬운 대로 스프를 추천한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가벼운 식사나 전채요리로 즐겨먹는 야채스프나 감자스프 중 한 가지는 어느 식당에나 반드시 있다. 주문할 땐 직접 식판을 들고 음식이 담겨 있는 진열대 앞에서 원하는 음식을 말하면, 흰색 유니폼을 입은 요리사가 접시에 음식을 담아준다. 


존과 내가 최근에 알게 된 펍 ´버몬트하우스(Beaumont House)´도 카보리 음식으로 꽤 유명한 곳이다. 더블린9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관광객에게는 접근성이 좀 떨어지지만 동네에서는 이미 소문난 펍이고, 최근 ‘2017년도 아일랜드 최고의 카보리 펍‘으로 뽑히면서 조금씩 유명세를 타는 눈치다. 아일랜드 전체 식당 중 ‘the largest, the longest cavery´, 즉 가장 다양한 카보리 메뉴를 선보이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펍이 있는 자리가 바로 기네스맥주의 창업자 ‘아더 기네스(Arthur Guinness)‘의 맨션이 있었던 자리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날은 여행을 위한 의식은 아니었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휴무를 얻어 기분이 좋아진 존이 버몬트하우스에서 점심을 쐈다. 나는 으깬 당근과 파스닙, 터닙, 양배추, 구운 감자를, 존은 두툼한 햄버거 패티와 익힌 야채를 주문하고, 전채요리로 야채스프와 새우칵테일까지 곁들여 거나한 점심을 먹었다. 


아일랜드 음식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한 가지 일화가 생각난다. 존과 결혼 후 처음으로 한국에 같이 갔을 때였다. 나는 당연히 엄마집에서 지내다 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방문계획을 들은 엄마는 외국사위와 함께 한 집에서 지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셨다. ‘너넨 숙소를 따로 잡아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하시는데 서운함이 왈칵 몰려왔다. 처음부터 환영받는 결혼은 아니었고, 언어 차이, 문화 차이 생각하면 나도 속으로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결혼 후 딸 부부의 첫 방문인데! ‘한 달‘이 너무 길어 그런가 싶어, 2주는 따로 호텔을 잡고 2주는 엄마집에서 지내도 되겠냐고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나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그냥 여기 와서 지내라. 뭐, 있다 보면 불편한 것도 덜해지겠지.“

그렇게 받아낸 허락이었기에 존도 꽤나 긴장하는 듯했다. 며칠 동안 생각이 많아 보이던 존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국에서 내가 가족들한테 아일랜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면 어떨까?”괜찮은 생각 같았다. 존과 우리가족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도 깨고 점수도 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존의 첫 처가 방문은 생각보다 매우 순탄하게 흘러갔다. 2주를 지나며 존도 엄마도 서로에게 한결 편안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언니네, 동생네 가족까지 함께 모일 수 있는 주말 저녁을 잡아 모두 엄마집으로 초대했다. 

“좋은 고기를 사다가 커티지 파이를 만들 거야. 아이들도 분명 좋아할 걸!”

커티지 파이(Cottage Pie, 혹은 Shepherd Pie)는 다진 소고기 또는 양고기에 양파, 당근, 완두콩 등 잘게 썬 야채를 그레이비소스에 함께 버무려 익히고, 으깬 감자(매쉬 포테이토)를 뚜껑처럼 올려 오븐에 굽는 아일랜드 전통요리다. 원래 소고기를 넣은 것은 커티지 파이, 양고기를 넣은 것은 쉐퍼드 파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굳이 구분하지 않고 부른다. 그리고 보통 ‘파이’라고 하면 겉이 바삭바삭한 패스트리를 먼저 떠올리지만 커티지 파이에는 패스트리가 없다는 사실.

하루 전날 존과 나는 쉐퍼드 파이를 만들 재료를 사기 위해 함께 장을 봤다. 우리는 1등급 한우를 과감히 지르고, 감자, 당근, 브로콜리와 샐러드용 야채를 조금 샀다. 드디어 대망의 토요일, 존은 이른 오후부터 부엌을 차지하고 특유의 부산함으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존을 도와 야채를 썰고 샐러드를 만들기로 했다. 그 사이 동생네, 언니네 가족이 도착했다. 부엌의 도마질 소리도 바빠졌다. 오래 전 수납공간으로 변한 오븐은 오랜만에 제 기능을 할 채비를 갖췄다. 존이 필요하다는 요리도구를 이것저것 챙겨주며 더 필요한 게 없는지 끊임없이 신경 쓰는 엄마를 쫓아내다시피 거실에 앉아계시게 했다. 

오븐타이머가 요란하게 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쉐퍼드 파이가 식탁 위에 올랐다. 생크림처럼 부드럽게 올라앉은 매쉬 포테이토가 살짝 갈색이 돌도록 알맞게 익었다. 존이 먼저 접시에 파이를 한 국자씩 떠서 얹으면 난 그 곁에 샐러드와 익힌 야채를 담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집에서 엄마 아닌 다른 사람이 음식을 하기는 처음이다. 존이 만든 낯선 이방의 음식을 앞에 두고 엄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굿 잡, 존!” “유어 웰컴, 엔조이!”

한국말로 한다면 ‘사위, 음식 만드느라 수고 많았네.‘ ‘어유, 무슨 말씀을요, 장모님. 맛있게 드세요.‘ 쯤의 정중하고 어색한 인사였을 텐데, 영어로 하니 단번에 격식이 무너진다. 이럴 땐 영어라는 게 참 쓸모 있다. 아이리쉬 음식도 그렇다. 한 사람 앞에 접시 하나면 끝. 한국음식처럼 수십 가지 접시를 한 상에 차리지 않아도 되니 설거지도 그만큼 간편해진다.

존의 커티지 파이는 대성공이었다. 그레이비소스와 어우러진 소고기와 감자가 부드러우면서도 느끼하지 않아 우리 입맛에도 잘 맞았다. 엄마는 물론, 조카 셋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깨끗이 접시를 비우는 것을 보며 존의 얼굴에 함지박만한 웃음이 걸렸다. 그날 한 끼의 식사를 통해 나의 가족들에게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조금 더 가까워졌으리라. 그리고 언어와 문화, 생김새가 다른 존을 바라보는 마음도 조금은 더 편안하고 유연해졌으리라.

나는 알고 있다. 그때 존이 한국의 가족과 나누고 싶었던 건 단지 한 끼 식사가 아니라 바로 아일랜드였다는 걸. 음식의 힘은 생각보다 놀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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