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만 친해지는 것은 아니다

밴쿠버에서 비와 친해지기

by May


2015년 9월 23일, 밴쿠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제일 먼저 반겨준 건 먹구름 속에 드리워진 칙칙한 날씨.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였다.

내 키의 절반보다 더 큰 이민가방을 끌고 가방을 멘 채 스카이트레인(밴쿠버 지하철) 타고 머무를 집으로 향했다.

알 수 없는 막막한 앞으로의 나의 미래처럼 먹구름 속에 가려진 밴쿠버의 날씨는 꽤나 답답했다.


어느 곳이든 여행을 가면 제일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는 날씨이다.

스물여섯, 시드니에서 처음 맞이했던 그날 아침. 창문을 통해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살들 속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밖에는 알 수 없는, 처음 들어보는 듯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평화로웠고 따뜻했다.


한국에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뚜렷한 사계절에 한평생 적응되어 있던 나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민 9년 차에도 아직도 비에 적응 중이다.


밴쿠버는 비가 자주 오는 곳.

이 자주라는 말이 나는 이렇게까지 자주일 줄은 몰랐다.

당장에 밴쿠버에 가면 학교 수업부터 취업, LMIA 및 영주권 진행까지... 나는 당장 눈앞에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운도 따라주지 않아서 학생비자 기간을 여유 없이 너무 짧게 받았다. 학교 수업 종강일인 2016년 6월 30일 그날까지가 내가 밴쿠버에서 합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약 9개월 안으로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서 영주권 진행까지 마쳐야 했다.

눈앞에 해야 될 일들이 태산이다 보니 사실 밴쿠버가 비가 자주 내리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당장에 눈앞에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는데 비를 생각하고 고민해야 될 여유까지는 없었던 거 같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세 달... 정말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젖은 땅, 언제나 물방울이 맺혀 있는 나뭇잎들, 버스를 타면 사람들의 비에 젖은 옷들 속에서 풍겨오는 습하고 쾌쾌한 냄새들. 이런 모습들을 마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한국의 가을 하늘 날씨가 참 그리웠고 지금도 그립다.

천고마비라는 말처럼 파란 가을하늘아래 이제 막 여름을 벗어나 선선한 공기가 시작되려고 하는 10월의 가을 하늘이 지금도 가끔씩 미치도록 그립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과 공기에 나는 굉장히 행복해할 사람이라는 걸.
그것의 부재로서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작년에 시애틀로 오게 되었다.

밴쿠버와 시애틀은 날씨가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어왔으나 이렇게까지 닮아 있을 줄이야!

검은 구름에 드리워진 어두컴컴한 하늘과 비. 살고 있는 땅만 바뀌었을 뿐 비는 여전히 옆에서 그 존재를 뽐낸다.


"아이고, 하나님 너무 하시네요. 이렇게까지 비를 내리신다고요" 아무 잘못이 없는 그분께 푸념하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비가 자주 내리니 몸도 덩달아 게을러진다.

캄캄한 구름으로 모든 햇살을 드리운 날들. 이불을 푹 감싸고 따뜻하게 잠자고 일어나 영화 한 편 보고. 딱 집순이로 있기에 아주 좋은 날씨이다.


언제쯤이면 나는 이 비와 친해질 수 있을까?

"이제는 살다 보니 비가 아무렇지 않아요"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그렇게 이 비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그 사람의 다른 장점들을 보며 마음이 열리게 되면 서로의 관계는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면서 너와 친해져 볼게. 우리 조금씩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가까워져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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