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 269조 낙태죄를 삭제하는 269명의 피켓 퍼포먼스 참가기
혼자서도 집회 잘 가는 나는 지난 토요일,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에서 주최한 시민참여액션에 참여했다.
까만 옷을 있는대로 챙겨입고, 뚜벅뚜벅 걷다가 텀블러를 덜 닫아 옷에 커피를 쏟고, 피켓 액션 리허설 중에 가장 먼저 피켓 귀퉁이를 부러뜨리면서... 어쨌든 오늘도 사소한 행동을 함께 했다.
전날인 9월 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Global day of Action for Access to Safe and Legal Abortion)’이었다고 한다.
국제 행동의 날에 맞춰 열린 <형법269조 낙태죄를 삭제하는 269명의 피켓퍼포먼스>
드레스코드는 블랙이었다.
아마도 유명한 낙태죄 반대 집회인 2016년 폴란드의 ‘검은 시위’ 또는 ‘검은 월요일’에서 유래했을테지. 익명의 시민 주체들이 2년 여 활동해 온 여성 임신중단권을 위한 집회 [비웨이브] 역시 언제나 드레스코드는 블랙이었다.
이번 [모.낙.폐] 의 행사는 집회가 아닌 피켓 퍼포먼스여서, 주최측의 신호에 따라서 참가자들은 성실히 숫자의 일부(나는 2의 한 부분이었다)가 되었다가, 선창되는 구호를 따라하고 (국제 행동의 날에 맞게 영어구호가 있어서 굉장히 글로벌하게 울렁거렸다) 성명서 낭독의 좋은 배경이 되고자 노력했다.
성명서의 내용을 받아 적지는 못했으나 (피켓 들고 팔 아파하고 있었으니까) 주된 내용은 왜 지금 당장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는가, 에 대한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바로 낙태는 결코 ‘태아의 생명권 vs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대립이 아니라는 것.
낙태가 형법상 죄가 된다는 것, 그건 재생산권을 여성이 아닌 국가가 행사한다는 의미이지, 결코 태아를 보호하겠다는 게 아니다.
만약 태아의 생명권을 우선한다면 어째서 국가는 모자보건법 14조를 만들어 우생학적 이유, 즉 장애를 가질 확율이 높은 태아에 대해서는 낙태를 허용하는가.
국가주도의 산아제한 정책 때 마을마다 일명 ‘낙태버스’가 돌았고 장애인 시설에서는 강제피임시술과 낙태시술이 벌어졌다는 건 또 무엇을 의미하나.
태아의 생명권을 합법적으로 침해해 온 건 국가였다.
재생산권은 국가가 가지고, 여성들은 그 도구로서 취급하는 것... 그게 낙태죄의 본질이다.
지난 번 올렸던 책 [유럽낙태여행]은 다큐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그 중 첫번째 공개된 클립에서 (*<세탁소의 여자들> 링크)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말한다.
낙태를 허용하면
여자들이 낙태파티를 벌일 거라고?
낙태를 좋아서 하는 여자가 어딨겠어.
아무리 합법이 되고 보다 안전한 시술과 약물에 접근이 가능해지더라도, 낙태 후 여성들은 신체적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다. 솔직히 합법화 되어도 낙태 비용도 적지 않을텐데 파티라니... (일부 합법인 국가들도 낙태시술에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낙태가 합법화 된다고 해서 오랜 금기가 갑자기 자랑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교육받은 것도 그렇지 않았나. ‘엄마 왜 나를 죽였어요?’라고 원망하는 거의 인간의 형체를 갖춘 태아 사진 같은 것.
낙태 후,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불임을 걱정하고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는 건 오직 여성들이다.
단 한 번도 남성이 낙태 결정 후 괴로워하며 그 트라우마로 상담치료를 받거나 주변의 평판을 염려하거나 혹은 불임(!)을 걱정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니, 우리나라처럼 태아 성감별과 여아 낙태가 심각했던 국가라면 ‘아빠, 왜 나를 죽였어요? 딸이라서?’라고 묻는 태아가 등장하는 공포영화나 도시괴담 또는 낙태반대 포스터가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책임도 혹은 죄책감도 여성의 것이라면 당연히 결정권 역시 국가가 아닌 여성의 몫이어야 한다.
269 퍼포먼스는 낮 1시 40분을 조금 넘어 끝이 났다.
끝나자마자 나는 당연히 기다렸다는 듯, 하드 트잉여 답게 폭풍 트윗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스타에도 올렸으나, 역시 이런 건 그쪽 감성이 아니긴 하다. 새로 산 발레 스커트나 올려야지..)
그랬더니 여성 이슈 집회에 자주 동행하는 분이 ‘이번에 몸이 안 좋아서 함께 못했네요. 미안해요’라고 글을 달았다.
미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면...
우리에겐 앞으로도 새털같이 많은 집회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마 관심이 있는 한, 그게 부조리하다는 걸 아는 한, 눈 감지 않는 한... 우리는 또 거리에 서게 되겠지.
하나의 피켓으로만 존재하더라도, 그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