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
늦은 밤 나는 컴퓨터로 여자 아이돌을 봐
모든 사람들은 꽃피는 여자를 다 갖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야 하는 젊은 여자의 시절이 지나면
이런 것이 슬프지 않겠지
이런 것이 두렵지 않겠지
-김사월 노래 [젊은 여자] 중에서
언젠가 술자리에서 남자A가 여자B의 외모를 칭찬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예쁘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진짜 장난 아니었지~!”
그 처음이라는 게 기껏해야 4,5년 전이었고 그 사이 B의 나이 앞자리가 바뀌긴 했으나 그래봤자 신체적 특징에 무슨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을까.
칭찬인지 후려치기인지 모를 말에 어쨌든 B는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누구나 20대 때는 그렇잖아요. 다들 그 때가 리즈 시절 아닌가?”
약간 웃자고 던진 말에 정색으로 되받아치는 나쁜 버릇이 있는 내가 대답했다.
“아니, 난 지금이 제일 나은데?”
어찌나 단호했던지 도리어 다들 농담인 줄 알고 웃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B보다 외모자본이 현격히 부족해서 더 웃기기도 했겠지.
그러나 B가 아닌 어제의 나와 경쟁하는 나는 그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안타까워 더 진지하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정말이라고, 나는 항상! 작년 사진을 보면서 올해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고.
여자C : “그럼 너는 죽을 때가 제일 예쁘겠다.”
나: “아마도. 제 장례식 때 꼭 오셔서 입관에 참여하세요.”
결국 언제일지 모를 내 장례식에 내가 손수 이른 초대장을 날리고 관뚜껑 닫히는 것까지 봐달라는 비장한 당부를 하며 대화는 마무리 됐다.
오해할까봐 말해두지만 나 역시 여자의 ‘리즈 시절’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능력이나 자원보다 나이와 외모가 계급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젊어서 나이 든 남성에게 선택될 가능성 때문에) 10대, 20대 초반 여성은 또래 남성보다 권력이 많다. 그러나 (물론 계급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50대 쯤에 이르면 여성과 남성의 권력은 비교 불가능하게 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젊고 예쁜 여성은 ‘억압받지 않는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188p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woman)은 모든 여성(female)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라 제3의 성인 것처럼 계급과 나이, 외모, 결혼 여부 등에 따라 ‘진정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이 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같은 책 189p
동안, 베이글녀 같은 단어들 생각해 보면 정희진 선생의 글을 그리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20대 중반을 넘었을 뿐인 여자 아이돌을 불러다 놓고 중년 남자 패널들이 ‘아이돌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후려치는 것이 현실이니까.
철지난 개소리도 기억난다. “여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같아서 23,24,25세에 제일 잘 팔리고, 그 때를 넘기면 떨이가 된다.” 딱 20대 초 중반의 젊고 예쁘고(*중요) 날씬한(*역시 중요) 여성은 모든 연령층의 남성에게 욕망된다. 그러한 나이와 외모로 획득한 권력이 최고조인 시기, 그게 여자의 전성기, 라는 거다. 그래서 30대는 20대를 흉내내고 40대에는 간극을 줄이기 위해 애쓰며 50대를 넘기면 그 시절을 애틋하게 회상한다.
참 이상한 일이긴 하다. 누구도 남자의 전성기를 20대 초중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시절 남자들은 젊은 시절 치기로 온갖 흑역사를 생산하기도 하고 사회로 향하는 성장판이 막 열린, 전성기를 준비하는 ‘청년’으로 취급될 뿐이다.
연령주의 사회일수록 나이 듦과 늙음은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이 듦과 늙음의 상관성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에게 나이 듦이 곧 늙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여성에게 나이 듦과 늙음은 같은 말이다. 대개 중산층 이상의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권력과 자원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 억압의 근거가 되는 성차별 사회에서는 여성의 존재성은 언제나 몸으로 환원된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의 존재 ‘의의’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몸의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 중심 사회가 ‘부여’한 것이지만 남성은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의해 형성된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190p
그래서 정희진 선생은 ‘남자는 나이 들고 여자는 늙어간다’고 말한다.
나이 듦에 따라 쌓이는 경험, 경력, 경제적 안정, 읽은 책의 권 수, 내뱉는 단어의 질과 숫자 등에 의해 오는 ‘전성기’는 이 사회의 주체인 남성의 몫. 여자는 욕망되는 타자의 위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늙음’을 감내할 뿐이다.
서두에 인용한 김사월의 노래 [젊은 여자]에서= 화자는 ‘꽃피는’ 나이지만 여자 연예인이나 인터넷 쇼핑몰 모델처럼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을 갖지 못했다. 젊지만 ‘진짜 여자’일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권력을 획득하지 못해 낙오된 젊은 여자는 차라리 어서 나이 들어 그 억압과 부조리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나 역시 그런 ‘젊은 여자’의 시기를 보내지 못한 사람이라 어쩌면 남보다 편하게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좀 더 치졸하게 말해보자면 내 또래들도 나이와 외모로 얻을 수 있는 권력에서 서서히 배제되고 있으니, 그것도 내게는 노화의 장점일지 모른다. (네네, 제가 좀 치졸합니다)
외모권력을 더이상 욕망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기 때문인지 나는 당당하게 ‘나는 관뚜껑 닫히기 전에 더 예쁠 것이다’고 망발을 하고 다닌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정말 진심이다.
서른 후반이 되어 내 눈이 갑자기 커지고 코가 높아지고 살이 빠진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터에서 좀 느긋해진 점이나 더 나은 문장을 쓰고 더 명료하게 말하는 내가 좋다. 그 여유가, 그 자신감이 묻어나 한결 반들반들해진 얼굴도 맘에 든다.
나도 또 주변의 많은 여성들도 늙어가는 대신 나이 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사회가 아무리 ‘젊은 여자’로 줄세우려 해도 많은 여성들이 그 대열을 훌훌 털고 나와 주름을 세는 대신 경력을 헤아리며 이제 막 전성기로 가고 있다.
....비록 조국의 현실은 누추하기 그지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