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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Dec 18. 2019

닫힌 사회에 들어가는 법, 뮤지컬[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리고 뮤지컬 속 여성 혐오에 대하여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리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리뷰를 쓰기 위해 김현경 선생님의 [사람, 장소, 환대]을 펼쳤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책의 서문이 바로 뮤지컬의 원작인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인용으로 되어 있었다. 아, 역시...


인용한 [사람, 장소, 환대]의 1장 첫 문단처럼 알앤디웍스의 창작 신작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사람됨, 성원권, 조건부 환대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극에 대한 짧은 정보:

제작: 알앤디웍스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상연기간 : ~2020.2.2

별 것 아닌 팁: 일부 사이드 블럭 좌석에서는 2층에 올라가는 그레이맨이 안 보일 수도 있다고. 어차피 1층 중간 블럭 앞 자리를 못 잡는다면 무대 연출을 만끽할 수 있는 2층 중간블럭 자리로 가시기를 추천함. 단 2층 1열은 난간에 의한 시야 제한 일부 있음.

   


(*스포 있습니다.)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사업 자금을 빌릴 목적으로 지인의 친지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집주인과 방문객들이 바라는 건 뭐든 마술처럼 만들어 내놓는 기이한 인물 '그레이맨'을 만나게 된다. '그레이맨'은 페터를 쫓아와 거래를 제안하는데 영원히 마르지 않는 황금 주머니와 페터의 그림자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페터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림자를 넘기게 되는데 큰돈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라며 손가락질 당해 어둠 속으로 은둔하게 된다.


이 환상동화 같은 이야기를 알앤디웍스는 정말 환상적으로 무대 위에 구현한다.


무대 안쪽 3면은 이동가능한 LED 스크린 벽으로 되어있어서 극의 전환에 따라서 영상도 변하고 각도도 변한다. 바닥은 거울처럼 이 영상을 그대로 비추어 무대는 더욱 풍부해진다.

요즘 뮤지컬에서 LED 스크린을 많이 쓰지만 몇몇 극을 제외하면 (젠틀맨즈 가이드나 메피스토 정도?) 오히려  '돈 아끼냐?'싶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영상 자체도 잘 만들었고 활용하는 방법이 극의 판타지적인 매력을 잘 부각해서 처음 볼 때 무대예술만으로도 표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무대 연출에 대한 자세한 기사는 여기로 : 링크)


그리고 그림자를 어떻게 드러내고 또 어떻게 감출 것인가, 궁금했는데 우선 그림자는 배우들이 검은 옷을 입고 등장해 표현한다. 특히 페터 슐레밀의 그림자인 임상희 배우는 너무도 아름다운 춤으로 그야말로 악마가 반할 만큼 우아한 연기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조명과 무광의 벽(미로), 또는 LED 스크린을 이용해서 그림자를 강조하고 또 사라지게끔 연출한다. (아주 가끔 각도에 따라서 페터의 그림자가 보여서 흠칫하지만 그 정도는 한쪽 눈 감아주는 게 관객의 예의.)


뮤지컬이니 가장 중요한 넘버-음악.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넘버들은 웅장하고, 웅장하고... 강하다. 처음 극을 봤을 때, 강약중간약 없이 강강강으로 몰아치는 넘버가 굉장히 피곤하다고 생각했고 배우들의 성대가 무척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듣다 보면 빠져들게 된다. 무대가 화려한 만큼, 역동적인 안무와 독특한 장치들이 이어지는 만큼 어쩌면 곡들도 충분히 화려하고 강해야만 전달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고.

내가 이 극에서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페터 슐레밀이 등장해 1막을 여는 '날 부르네'와 역시 페터의 넘버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

사실 두 곡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가사가 그나마 가장 서정적이고 스토리텔링이 있어서, 이다. 다른 넘버들은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듣기에 따라서는 유치한 가사들이 많아서 극이 상연되는 극장의 좋지 않은 음향 때문에 잘 들리라고 이렇게 쓴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아, 근데 듣다보면 또 다 좋아짐.)



191215_낮공. 조형균 그레이맨이 홍아센 음향의 기적을 만든 날, 로 기록해 뒀다.

이토록 근사한 무대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

사유의 여지가 많은 재밌는 작품이라 앞서 인용했던 글처럼 그림자와 환대, 성원권을 중심으로 리뷰를 써보려 한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그림자를 넘기고 황금 주머니를 얻은 다음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 됐어 이제 된 거야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이제 난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다시 시작할 거야 이제 난

-1막, 페터 슐레밀의 넘버 [새롭게 태어난 나]


첫 등장에서 페터는 미로의 입구에서 ‘문을 열고 들어간다’고 표현하고 황금 주머니를 얻은 다음에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라고 기뻐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듯이 그는 돈으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 즉 '성원권'을 획득했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러나 다시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페터는 사회로부터 배제당한다. 사람들은 그를 추방하려 하고 사랑하는 연인 리나와도 헤어져야 하는 위기에 몰린다.


돈 때문에 그림자를 팔았으니, 주인공 페터가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당연히 배금주의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하지만 만약 자본주의 사회의 몰인간성에 대한 경고라면... 어째서 '돈'이 있는데 환대받지 못하냐는 의문이 따라온다. 물신화된 사회에서 '돈'만 한 환대의 조건이 있을까. 이어서 돈보다 우선해야 할 '그림자'란 무엇인가는 의문도 따라온다. 게다가 페터를 배제하는 사회가 딱히 돈보다 다른 어떤 더 우월한 가치를 숭상하는 듯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런 그에게 그레이맨은 '영혼을 넘기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는 두 번째 거래를 제안해 온다. 게다가 그런 거래를 한 인간은 페터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거라는 암시도 덧붙인다.

진짜 고결한 ‘영혼’쯤은 팔고도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는 문제가 없는, 그런 사회라니.


그러니까 극 중에서 ‘그림자’는 어떤 숭고한 가치라기보다는 ‘돈’과 마찬가지로 어느 사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환대와 배제의 조건이 명확한
닫힌 사회의 문을 여는 방법,
돈과 그림자...
그리고 영혼?


뮤지컬에서는 페터의 마지막 선택은 꽤 열린 해석이 가능하게 되어있다. 뮤지컬이라는 게 재연할 수 없는 순간의 예술이다 보니 트리플 캐스트인 배우들의 해석에 따라, 그 날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관객들마다 다른 해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작은 비교적 분명하게 마무리된다.


친구여,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중에서


페터는 영혼을 팔지 않는다. 그는 영혼을 팔아가며 닫힌 사회의 문을 두드리기를 포기한다. 성원권 획득을 위한 투쟁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원작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을 아끼고 기억하는 (그를 작은 사회 안에 편입시켜 줄) 인물들과 재회하지만 결국 정체를 밝히지 않고 떠난다.


[사람, 장소, 환대]의 서문에서 이 책을 인용했던 김현경 선생님은 페터의 선택을 이렇게 평한다.


슐레밀이 그림자가 없는 인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장소화를 통해서이다. 칠십 리 장화 덕분에 그는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한달음에 갈 수 있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자기 집처럼 친숙하게 돌아볼 수 있다. 그의 시야는 지구 전체로 확장되며, 인식의 지평 역시 그러하다.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인류 전체에 속하는 방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중에서


굳이 뮤지컬을 원작이나 다른 텍스트를 인용해서 해석해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그럴 역량도 안 되고)이 극은 정말 해석하는 즐거움이 있다.


또 무대 연출이나 음악,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원작과 달리 벤델(하인)-그레이맨(악마)를 동일한 인물로 창조해냈다는 점 등...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굳이 해석에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재밌는 작품.





그런데,

이 극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사실 리뷰의 제목을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판 뮤지컬'로 할까, 계속 고민했다.

이 극에서 드러나는 여성 캐릭터의 도구화는 내가 최근 본 뮤지컬 가운데 가장 심각한 케이스.


이건 내가 알앤디웍스의 작품 대부분과 불화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알앤디웍스의 작품을 처음 본 건 뮤지컬 [더데빌]이었다. 대체 주식 실패가 뭐 그리 대단한 인간적 고뇌와 선택의 기로 인지도 납득이 안 되는데 주인공 존 파우스트는 그 때문에 악마, 블랙X와 거래를 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거래(내기?)의 판돈이 존의 연인인 그레첸이다. 존이 돈을 벌고 타락해 가는 동안, 고통받고 피폐해지는 것은 그레첸이고 결국 블랙X에게 넘겨진 것 역시 그레첸의 영혼. 흰 옷을 입은 순결한 그레첸이 퇴폐적이고 망가진 매드 그레첸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보는 내내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본 2018-19 [더데빌]에는 없었지만 초연에서는 그레첸이 블랙X에게 강간당하는 씬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여주인공 리나와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그림자는 그레첸보다도 못한 신세다. 그림자는 내내 애틋한 연기로 페터에게 돌아가기만을 꿈꾸는 지고지순을 보여주고, 리나는 폭력적인 두 남성 (페터와 파스칼) 사이에서 물건처럼 오가다가 결국 페터의 잘못을 대속하는 듯 파국을 맞는다. 제작진은 리나에게 "난 당신을 선택한 나를 믿으니까."라는 대사 하나를 주고 마치 여성 캐릭터에게 주체성을 줬다는 듯이 굴어서 보는 사람을 더욱 열 받게 만든다.


여성 혐오라는 것은 '맘충'이니 '된장녀'니 하는 프레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을 남성과 같이 꿈꾸고 실패하고 고뇌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남성 캐릭터의 선택에 좌우되고 오직 그를 위해 존재하는 순결한 성녀(때로는 회개하는 요부)로 만드는 것 역시 뮤지컬(을 포함한 문화예술 전반)의 가장 보편적인 여성 혐오이다. 그런데 그 모든 악덕이... 2019년에 초연된 창작 뮤지컬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알앤디웍스가 여러 극에서 '이걸 선택한 건 너 자신이야!'라는 메시지를 욱여넣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도 그 선택의 결과를 강조하기 위해 원작과 달리 리나의 파국을 추가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여러 해석과 뮤지컬에서의 결론을 보아도 주인공 페터가 그림자를 판 것이 '죄'라고 말하기도 모호한데 굳이 죗값을 리나가 치르게 함으로써 제작진이 전하고자 했을 '환대와 배제의 조건이 명확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 소외'같은 메시지도 약해져 버렸다.

제작진은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팔아먹고 극의 메시지까지 함께 팔아먹은 게 아닌가.


이번이 초연이니 재연으로 올 때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제작진이 좀 더 고민해서 고쳐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뻔한 여성혐오극으로 분류하고 안 보면 그만이겠지만... 그러기엔 소재도 무대도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매력적인 작품이라서 놓기가 아쉬우니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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