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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Dec 26. 2019

아직 격려가 필요한 딸들에게, 연극 [오펀스]

그리고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해

2020년 연극 뮤지컬 라인업과 내년 초에 개막하는 극의 캐스팅이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작품 목록만 훑어봐도 과연 남성 주연극, 그리고 무대 위에 남성 캐릭터가 다수인 극이 특히 대학로 중소극장에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성 2인극도 많고 남성 배역이 대여섯 명인 극에 여성 배역은 딱 하나, 그마저도 ‘여신’이나 ‘뮤즈’ 등으로 추상화되어 등장하는 극도 적지 않다.

얼마 전, 내년이면 10주년을 맞이하는 남성 2인극에는 무려 15명의 남성 배우‘만’ 캐스팅된 것을 보고 새삼 ‘정말 남배우 일자리는 많구나.’ 생각했다.


상연 중인 극장 내에 함께하는 관객, 스태프, 배우 모두를 놓고 보면 공연예술은 여초지만 무대 위의 주역만 놓고 보자면 심각한 남초.

물론 무대뿐만은 아니다. 종사자 대다수가 여성이라도 결정권자나 임원, 고용주 등은 남초인 업계는 대한민국에 흔하니까.


공연계에 여성 배우들이 맡을 역이 적다는 건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 서사(아닌 게 드물지)에 한 둘 넣어놓은 여성 캐릭터는 그만큼 전형적이고 (엄마, 성녀, 요부... 혹은 썅년) 납작하며 남성 캐릭터들의 서사에 도구적으로 쓰이기 일쑤다.


그래서 최근 공연예술 팬들은 젠더 프리(Gender-free : 성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음) 캐스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기존에 남성 배우가 맡던 역을 여성 배우가 하는 것이다.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뮤지컬 [마틸다]의 트런치불 역 같은)도 있다. 남성 배우가 여성 캐릭터를 연기함으로써 분명 성별 이분법을 깨는 것도 의의는 있을테지. 하지만 젠더 프리에 대한 요구가 커진 이유가 여성 배우들의 더 많은 일자리, 그리고 배역의 다양화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일단은 여성 배우들이 더 많은 남성 배역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런 때에 이 극을 만났다. 연극 [오펀스].

해롤드, 트릿, 필립 세 남성이 주인공인 극에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세 여성 배우가 캐스팅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이야기는 세 명의 고아들에 대한 이야기다.

트릿과 필립은 고아 형제다. 어릴 때 부모를 잃은 뒤, 아동보호기관에서 동생 필립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트릿은 노심초사하며 살아온 듯하다. 노상에서 취객의 주머니를 터는 등 불법적인 일로 돈을 벌어온 트릿은 동생을 폭력적인 방법으로 과잉보호한다. 글도 배우지 못하게 하고 ‘너는 세상 모든 물질에 알레르기가 있다’며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 하지만 집안에 갇힌 채로 필립은 홀로 글자를 깨우치고 더 넓은 세상을 꿈꾼다.

위태로운 고아 형제의 삶에 갑자기 얽혀 든 인물, 해롤드. 그 역시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다. 술에 취한 해롤드는 트릿을 오래된 TV 시리즈 ‘앵벌이 키즈’ 속 주인공으로 착각한 듯했다. 트릿은 돈을 챙길 요량으로 그를 납치한다. 아니 납치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해롤드의 침입에 가까웠는지 모른다. 트릿이 공포로 단단히 걸어 잠겄던 문을 해롤드는 쉽게 열어젖힌다. 열린 문 너머로 과연 무엇이 찾아올까.


(*약간의 스포 있습니다)

실컷 울면서 극을 보고 나면 묘하게 위로가 된다.

아무리 문을 잠가도 밤은 이미 스며서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며 해롤드가 꽁꽁 닫힌 창문을 활짝 열어젖힐 때, 필립이 처음 느꼈을 해방감과 환희는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찢어진 지도를 이어 붙여서 길을 찾아내려는 필립의 의지와 용기도 보는 이를 설레게 만든다.

날이 저물면 멀리서 가로등이 밝아오는 ‘기적’을 필립이 이야기할 때, 무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천장 백열등이 별처럼 빛나는 연출도 정말 뭉클하다

그렇게 필립을 응원하다가 극의 후반에서는 트릿을 안아주고 싶어 진다. 동생을 지키고 싶었고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보호받고 싶었던 트릿이 상처 입은 고양이처럼 웅크릴 때, 나도 해롤드가 되어 그 등을 다독여 주고 싶어진다.


세 주인공 모두에게 해피엔딩은 아닐 수 있겠지만, 해롤드 역시 다시 가족을 얻었고 마지막까지 잃지 않았으니 비극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해롤드는 트릿과 필립 형제를 다독이며 외롭고 고단했던 자신의 유년도 함께 위로했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의 바람처럼 형제는 날개를 단 듯 가벼운 걸음으로 춤추며 극은 막을 내린다.


2019년 11월 12일 밤공.

나는 세 여성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여배 페어로 이 극을 봤다.


남성의 이름으로 연기하는 세 여성 배우는 모두 남성용(으로 보이는) 바지와 재킷을 입었다. 필립은 트릿을 ‘형’이라고 불렀다. 무대 위에 남자 셋이 있다고 생각하며 극을 보다가 2막에서 정경순 해롤드의 대사를 듣는 순간 눈앞이 멍해졌다.

분노와 두려움, 절망에 몸무림 치는 트릿을 향해 해롤드는 다정하게 손짓하며 말한다. 딸아.’라고.


딸아
이리 와 내가 니 어깨를 주물러 줄게


순간 세 고아들의 서사에 여성의 서사가 얹혔다.

동생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자를 빼앗고 문을 걸어 잠겄던 트릿에게서 그에게 가해진 여성폭력이 자연스럽게 읽혔다. 해롤드가 트릿을 따라온 이유에 고아라는 정체성 이외에도 똑같이 폭력이 난무하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온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더해졌다. 해롤드와 트릿 형제의 관계성이나 트릿의 폭력성이 더 쉽게 납득이 됐다. 세상의 수많은 딸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그들의 삶과 조금은 닮은 듯하니까.


사실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해롤드의 대사,  “너 누군가 어깨를 다독여 준 적 있니? 누구나 격려가 필요하지. 이리 와”라는 게 처음엔 좀 갑작스럽기도 하고 노골적으로(힐링을 겨냥하는?) 느껴져서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딸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객석에서 극 중으로 호명되었다. 해롤드가 지나온 고독도 트릿이 견뎌온 폭력도 필립이 꿈꾸던 탈출도 어느새 나의 삶과 겹쳐졌다.

지금도 가끔 정경순 해롤드가 ‘딸아’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떠오르면 괜히 울컥하게 된다.

확실히 여성 배우가 여자의 이야기를 할 때, 여성 관객은 보다 더 잘 이입하게 된다. 그동안 남자 이야기만 줄곧 보고 듣고 자라와서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한편 극 중 배역의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해롤드 역의 정경순 배우와 트릿 역의 최유하 배우 역시 “남성을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 처한 인물을 연기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거칠고 외롭게 살아온 세 명의 고아들을 여성으로 보든 남성으로 보든 극의 주제를 전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건 그저 인간의 이야기니까.

 

흔히 ‘여성 서사’라는 말을 쓰고 여성 서사에 바람직한 여러 조건을 정리해 보기도 하지만 정작 ‘남성 서사’라는 말은 어색하고 그 성립조건도 생각해 내기 어렵다. 아마도 당연하겠지. 이야기의 기본값이 남성 서사 였으니까.

역사가 남성들의 승리와 패배를 기록했듯이 극 중 인간의 이야기는 언제나 남성을 주인공으로 쓰였다. (선악의 본질을 고민하거나, 생명을 창조하거나,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거나 다 남자가 했다.) 결국 남성의 이야기가 인간의 이야기라면 그 모든 배역을 여성이 맡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자도 인간이니까.


이 극을 돌이켜보며 또 깨달은 것이 있는데 남성의 이름으로 연기하는 여성 배우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설사 ‘딸아’라고 부르지 않고 ‘아들아’라고 불렀다고 해도 아무런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목소리를 일부러 굵고 낮게 내지도 않고 머리를 짧게 자르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남성 배우들의 액션은 과장되고 어색하다. 물론 극에 따라 다르지만, 가늘고 높게 내는 목소리, 머리를 과장되게 쓸어 넘기거나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입술을 내밀고 때로는 가슴을 모으는 액션까지 더하는 연기가 적지 않다. 그 여성 캐릭터를 희화화하기 위해 일부러 남성배우를 쓰는 경우, 더욱 그러하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성을 표현할 수 없다는 듯이.


입술 내밀고 새침한 표정
가슴을 모아 올려야 여자?
이런 극 영영 다시 올리지 마세요


나도 내 주변 여성들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여성’을 만들어내는 남성 배우와 연출을 보는 건 무척이나 불편, 아니 정 떨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 배우는 바지 정장  벌만 입어도 남성을 연기할  있는데  남성 배우들은 그게  될까? 어쩌면 남성은 인간의 기본값에 가깝지만 여성은 객체로 취급하기 때문에 그 특징을 굳이 만들어 과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연극 [오펀스]는 서사와 캐릭터 조형, 무대와 조명까지 미덕이 참 많은 극이라 젠더 프리로만 리뷰를 쓰긴 좀 미안하다.

하지만 드무니까.

이렇게 재밌는 캐릭터(특히 트릿. 전혀 올바르지 않고 분노조절장애에 폭력적이지만 민폐 캐릭터 취급이 아니라 관객이 보듬어 줄만큼 연출과 대본이 정성껏 만들어낸)가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일이 드물고 한 무대에 여성 배우가 둘셋씩 함께 서서 주역으로 연기하는 일도 드무니까. 여전히 젠더 프리는 시기상조라는 말만 들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관객들은  많은 여성 배우를 무대에서 만나야만 하고 여성의 입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아니 인간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덧.

2020년 2월에 개막하는 뮤지컬 [미드나잇:앤틀러스]에서 기존에 남성 배우가 하던 ‘비지터’ 역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했다. 이 캐스팅이 시작이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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