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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Mar 01. 2020

걷기 위해 지도를 만드는 여자들, 뮤지컬 [마리 퀴리]

천재든 아니든,  

자신만의 삶을 온전히 걷기로  여자들은 누구나 새로운 지도를 만들기 위해 격렬히 싸운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다.


나도 어릴 때 [퀴리 부인]이라는 제목의 위인전을 읽었다.

퀴리 부인이라 불린 여성 과학자의 이름이 '마리'라는 걸 어린 나는 기억했던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운동가 헬렌 켈러는 퍼스트 네임까지 기록되었지만 마리는 퀴리라는 남편의 성으로 남았다. 물론 헬렌 켈러의 어린이 위인전에는 그가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대 여자들의 사회활동을 기록하면서 어떻게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마주쳤을 수많은 벽과 그걸 넘어서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기록되어야만 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에는 그런 여자의 이야기가 있다. 2020년에 초연하는 작품이라면 (*물론 창작산실을 통해 이 극이 발표된 건 2019년이지만, 정식 초연은 올해다.) 반드시 필요하고 또 모두가 원하는 이야기 일 것이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의 일화를 다룬 뮤지컬 [헬렌 앤 미]에서도 헬렌의 장애뿐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벽에 대한 이야기도 일부 담겨있다.)


뮤지컬 [마리 퀴리]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3.29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태어난 마리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한다.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이나 독일의 대학은 남성만 입학할 수 있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에게 허락된 장소가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뿐이었던 것이다.


마리는 '지도' 한 장을 들고 대학으로 향한다. 그가 지도라 말하는 건 ‘주기율표’다.

식민지 치하의 이민자라도, 여자라도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면 그 이름을 명명해 주기율표에 추가할 수 있다. 마리는 그 주기율표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로 한다. 자신을 미스 폴란드, 이상한 여자, 까만 올만 입는 불쾌한 여자라 부르는 세상에 마리 스쿼도프스카 라는 이름을 남기려는 것이다.

그에게 '주기율표'는 자신의 자리를 표시할 삶의 지도인 셈이다. 그리고 애초에 세상이 마련해 주지 않은 자리를 찾기 위한 여성 과학자의 전장이기도 하다.


3월 1일 낮공 커튼콜. 마리역 정인지, 안느역 이봄소리, 루벤역 양승리, 피에르역 임별, 이렌 역 이예지 외 원캐스트.


나중에 다시!
난 그 말 정말 싫어.
폴란드인이니까 나중에 다시!
학교를 가야 할 때도 돈이 없으니까 나중에 다시!
여자니까 눈 앞에 데이터가 뻔히 있는데도 나중에 다시!
나중에 다시 할 수 있는 걸 왜 지금 못하는데?
나중에 못 할 걸 뻔히 알고서 하는 말이잖아.

- 뮤지컬 [마리 퀴리] 중 마리의 대사


라듐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리는 이를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당시 진행 중이던 라듐의 방사선을 이용한 암 치료 실험 등은 중단시키지 않고 라듐의 이로움과 해악을 함께 찾아내고자 결심한다. 마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이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를 만류하며 일단 모든 실험을 중단하고 '나중에 다시' 시작하자는 남편 피에르 퀴리에게 마리는 '그 말이 정말 싫다.'며 '당신은 모른다!'라고 소리친다.


그는 알고 있다. 여성 과학자인 자신에게 나중에 다시 올 기회란 없다는 것을. 영혼의 동반자이자 평생의 연구 동지였던 남편조차도 알 수 없는 여성 과학자 마리의 삶. 마리 앞에 놓인 벽은 피에르에게 보이지 않는다.

라듐을 발견하고 노벨상을 받을 때조차 먼저 호명된 것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이름이었다. 이어서  '마담 퀴리'가 호명될 때, 등 뒤에 선 피에르는 그 순간 차갑게 굳어가는 마리의 표정을 보지 못한다. 마리의 얼굴을 마주 보고 공감하는 건 객석의 관객들이다.


피에르는 마리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걷는 사람일 순 있지만 두 사람 발아래 펼쳐진 길은 달랐다. 피에르가 모르는 사이 마리는 허겁지겁 벽을 넘고 돌부리에 넘어지며 그와 발맞춰 걷기 위해 숨 가쁜 레이스를 했는지 모른다. 피에르는 마리의 전장에 들어올 수 없고 함께 지도를 만들 수도 없었던 거다.

어쩌면 그래서 마리는 피에르가 아닌 안느를 '나의 별' '또 다른 나'라고 불렀던 것일까.


안느.

그는 마리가 파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만난 여성이다. 같은 폴란드 출신으로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온 안느는 기차의 인연으로 마리의 소개를 받아 언다크라는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언다크에서는 마리가 발견한 라듐을 이용해 시계를 만들고 있었다. 시계 다이얼에 라듐을 칠하는 과정에서 다량의 라듐을 섭취하게 된 직공들은 하나 둘 사망하고 라듐의 유해성을 숨기려는 공장주 루벤은 이 모든 사인이 '매독'이라고 알린다.


마리처럼 안느 역시 지도가 필요했다. 기득권자들이 만든 세상에 많이 배우지 못한 여자 직공의 자리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라듐의 유해성으로 노동자들이 죽어간다고 외쳐봐도, 이름도 지위도 없는 여성노동자의 말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진실로 가는 길은 안느가 만들어야 하며 그가 걷는 길이 곧 새로운 지도가 될 터였다.


마리가 자신의 연구업적이 사라질까 봐, 또 실제로 라듐의 방사선으로 치료효과를 보고 있는 환자들을 걱정해 유해성에 대한 발표를 꺼리는 사이 안느는 홀로 거리로 나간다.


안느가 거리에서 죽은 동료들과 함께 부르는 넘버 '죽은 직공들을 위한 볼레로'를 들으면 살아남은 자들은 애도와 함께 죽은 자들의 못다 이룬 꿈까지 짊어지고 산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오늘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그러하듯, 자본을 갖지 못한 노동자에게 유일한 자산이며 교환수단인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안느는 진실을 밝혀달라고 외친다. 차라리 자신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검해 진실을 밝혀달라고.


극 중에서 마리와 안느는 그 죽음의 문턱에서 재회한다.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 과학자로서의 직업윤리, 안느에 대한 우정과 연민 사이에서 마리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안느는 마리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준다.

마리가 누구인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안느는 정확하게 가리켜 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는다. 각자의 전장이 하나의 지도 위에 합쳐지는 것이다.


넌 항상 나였어
너의 눈부신 그 빛이 나를 빛나게 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건
바로 너라는 별 하나
언제나 같은 자리에
그대는 나의 별 하나  

- 마리와 안나의 듀엣 넘버 [그댄 내겐 별] 중에서


극 중 여성 캐릭터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듀엣 넘버가 주어지는 극이 몇이나 될까.

기억나는 건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키티가 서로를 이해하며 부르는 '그때 알았더라면'과 뮤지컬 [헬렌앤미]에서 헬렌과 앤이 서로를 위로하며 손을 마주 잡는 '헬렌앤미' 정도다. 그 외의 극에서 거의 한 남자를 향한 사랑을 노래할 때나 두 여자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놀랍게도 내가 무척 사랑하는 여성 주연극 [아이다] 역시 그렇다. (*아이다와 암네리스가 서로 동지애를 담아 부르는 곡은 '또 다른 나'의 리프라이즈로 무척 짧다.) 애초에 남자 주인공과 삼각관계로 엮일 게 아니라면 한 극에 둘 이상의 여성 주역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아! [위키드]!!! 근데 내가 못 봄 ㅠㅠ)


가장 아름답고 따스한 넘버가 두 여성 캐릭터에게 듀엣으로 배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 극 [마리 퀴리]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마리 퀴리와 안느의 일화는 물론 극에서 창작된 것이다. 안느의 모델이 된 '라듐 걸스'는 미국 뉴저지주의 시계공장에서 있었던 일이니 프랑스에 살던 마리와 연결될 리 없다.


하지만 정말 그 시절 마리 퀴리의 곁에 '안느'같은 여성 동료가 없었을까.


1차 세계대전 당시, 마리 퀴리는 큰 딸 이렌 퀴리와 또 많은 여자들과 함께  X선 촬영기를 들고 일종의 이동 진료 활동을 했다고 한다. 역사가 생략한 수많은 여성의 이름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아무리 대단한 천재도 결코 홀로 길을 만들거나 걸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분명 마리의 곁에 기록되지 않은 혹은 알려지지 않은 '안느'가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남성들의 성전으로 여겨지는 과학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천재와

거대한 자본과 싸워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노동자.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가 있는 뮤지컬 [마리 퀴리]는 정말 내가 반할 만한 요소가 다 들어있다.


그리고 그런 서사를 찾고 있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2월 27일 밤공 캐스팅보드, 마리역 리사, 안느역 김히어라, 루벤역 양승리, 피에르역 임별, 이렌역 이예지 외 원캐스트.




나름 브런치에 후기를 쓸 때 원칙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최소 3번은 본 극'이라는 거다.

근데 뮤지컬 [마리 퀴리]는 급하게 두 번만 보고 썼다.

상연 기간이 길기 않은 작품이라 늦지 않게 후기를 써서 누구 한 사람이라도 이 재밌는 극을 봤으면 해서이다. (*아무도 시킨 적 없지만 혼자 하는 영업글) 물론 나 역시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꾸준히 이 극을 보러 갈 것이다.


맘에 쏙 드는 서사 외에도 넘버와 무대, 조명, 극장까지 다 좋다.  

대학로 소극장에서 고통받았던 내 허리를 비교적 편안하게 쉬게 해 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등받이가 머리까지 올라오는 의자가 이렇게 소중한지, 내가 미처 몰랐다. 예스24 스테이지 1관 2층 반성해라. 아트원, 너도! 대극장이지만 엘아센도 참 할 말 많다) 시야도 쾌적하고 음향에도 불만 없다.

그리고 중극장이지만 회전 무대를 사용해서 장면별로 배경이 전환되는 것 역시 정말 좋다. 무척 심플하지만 효과적으로 나눈 3개의 공간, 때로는 벽으로, 창으로 활용되는 회전무대. (*이건 직접 봐야 무슨 소리인 줄 안다.)

조명도 정말 아름답다. 원래도 글자 조명을 좋아하는데 복잡한 수식이라든가 주기율표 같은 조명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소중한 이의 죽음 직후에 마리의 혼란한 심경을 표현한 할퀸듯한 조명이라든가, 노벨상 수상 당시 피에르 퀴리가 호명될 때 들어오던 핀 조명, 피폭된 노동자들을 쫓던 초록빛 조명 등등 무척 다채롭고 적절한 조명에 내내 감탄이 나왔다.

다만, 극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피에르 삼각자 씬에서 그 백색 조명은 제발 좀 빼줬으면 좋겠다.


아쉬운 것이 없는 건 아니지만... 1막의 지루함은 2막의 재미로 상쇄할 수 있고 재연이 올 땐 더 잘 고쳐서 올 거라 믿기 때문에 쓴소리는 넣어두겠다.


이야기도 무대도 모두 아름다운 극, 뮤지컬 [마리 퀴리]는 3월 29일까지 신당역 9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 충무아트센터 지하 3층 중극장 블랙에서 한다.


중극장이라 비교적 가격이 세지 않고 극장 입구에서 열화상 카메라 놓고 발열 측정하고 있으며 곳곳에 손 소독제가 비치되어 있으니...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일상의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컨디션 좋은 날, 모두 한 번은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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