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어여쁘고 누구나 그렇다, 는 구절을 많은 사람들이 인용한다.
아는 만큼 이해하고, 이해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다고 그런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참 모질고 차가운 세상에 끝없이 말을 거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성공에 미치고 질투에 눈멀어 장래가 창창한 남자 앞길 막은 얼굴 없는 마녀로 보낸 500여 일.
김지은 씨는 어쩌면 그런 기대를 안고 이렇게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알면 보이고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거짓과 편견에 눈이 흐려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쩌면 당신도 만날 수 있을, 진짜 [김지은입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선생님이 “김지은!” 하고 부르시는 목소리에 “네”하고 크게 대답하는 일이 두려웠다.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이라면 대화할 수 있을 텐데. 큰 목소리로 부르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졌다. 매번 울음이 터졌고, 그 울음 탓에 양호 선생님과 따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책 [김지은입니다] 중에서
누구나 기억 속에 그런 아이가 있을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 언저리까지 겨우 손을 들다가 우물쭈물 내리고 마는 작은 아이. 책상을 마주한 친구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일 수도 있는. 교실 저편의 아이와는 친하지 않지만 옆자리 아이와는 곧잘 웃으며 재잘대는 그런 아이.
작은 서점을 꾸리는 꿈을 꾸며 문학을 전공했지만 학자금 대출과 생계에 쫓겨서 급히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해야 했던 청년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학위를 땄고 그럼에도 쉽지 않은 삶은 이리저리 부대끼다 전공이나 꿈과는 가장 먼 어느 자리에 도착해 버리는 서른 즈음의 인생에 대해서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이 바로 ‘김지은’이다.
그는 남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거나 목소리가 큰 사람도 아니었지만, 성실한 성격 탓에 궂은일을 떠맡고 혼자 울음을 꾹꾹 참으면서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일 밖에 모른다고,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자신만의 속도와 성실로 산다는 건, 그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차기 대권주자라는 안희정의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착취의 고리를 끊어내고 숨죽인 다른 피해자들을 감싸안는 용기는 결코 문득 솟아난 게 아닐 거다.
그런 사람이었겠지. 어떤 고통 속에서도 상황을 응시하고 자신을 스스로 구할 줄 아는 단단한 사람. 김지은.
안희정을 24시간 수행하며 나는 수시로 경찰 고위 간부의 전화를 지사에게 연결해주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만나고 있는 지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있는 지사를 청와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사에게는 일상인 그런 대화와 만남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그가 가진 권력을 항상 다시 실감했다. 나는 그와 싸울 수 없음을, 내가 겪은 것을 어느 곳에도 상의할 수조차 없음을 알았다. 내가 신고한다면 그 신고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안희정과 관계를 갖고 있는 이의 부하 직원들일 것임을 알았다.
사회초년생 시절, 가끔 선배들은 우리가 실수를 할 때 그런 말을 했다. “이 바닥 좁아. 너 어디 가면 누가 나한테 걔 어떠냐고 안 물어볼 것 같아?” 선배들의 화려한 이력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아직 업계에서 입지가 전무할 때였기에 그 말 한마디가 참 무겁고도 무서웠다. 평판을 만들고 소문을 낼 인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선배는 내 피부에 와 닿는 ‘위력’이었다. 밖에서 보면 별 거 아니지만 안에서는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해자가 안희정이라면 어떨까. 피해자는 그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 또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수행비서라면?
여러 전문가들은 지은 씨가 첫 피해 이후 8개월 만에 고발을 결심한 것은 무척 빠른 것이라고 했다. 물론 첫 피해 직후 고발을 결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20년이 걸리고 또 누군가는 영원히 상처를 품고 침묵한다.
이렇게 대단한 권력을 상대로, 그러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지은 씨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 자신이 본래 강하고 올곧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한창 재판 방청을 다닐 때 활동가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나도 들은 적 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서 특이한 점 중에 하나는 피해자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거라고.
결국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다. 수화기에서 적막이 흘렀다. ‘그래, 역시 다 똑같구나. 도와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그런 생각이 스쳐갈 때쯤, 적막을 깨고 목소리가 들렸다.
“도와줄게.”
그 한 마디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깨졌다.
이미 몇 사람에게 피해 사실을 둘러 털어놓았던 김지은 씨가 처음 듣는 대답이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무거운 지, 알고 있다.
도움의 손을 기꺼이 내밀어준 그 ‘첫 사람’이 겪어야 했던, 아니 지금도 겪고 있는 고충을 잘 알고 있으니... 아마 그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결심하고 그는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뉴스룸] 보도로 지은 씨의 피해사실을 접한 과거 안희정 대선 경선 캠프의 동료들 몇 명도 자발적으로 성명서를 내고 지은 씨의 곁에 섰고 이후에 기꺼이 법정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진실을 증언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고발을 당하고 일자리가 끊기고 무수한 뒷말을 들으며 고초를 겪었다.
안희정이 가진 권력의 크기만큼 사회적 지원도 뒤따라 지은 씨를 지원했다.
변호사들과 여성단체, 그리고 익명의 시민들이 거리에서 법정에서 기꺼이 그와 함께 섰다.
하지만 아무리 다정하고 선량한 연대자도 피해자의 짐을 다 덜어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년간 많은 분이 함께해주셨지만, 지독히도 고독했다. 죽음을 고민하고 시도하던 그 여러 번의 좌절 속에서 나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다. 종잇장 뒤에서 나를 묵묵히 지지해주는 누군가와 나긋이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살아내겠다고 아등바등 지내온 시간들이 흰 종이 위에 활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며 위로받았다.
서문의 이 문단이 너무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모여 너른 보호막을 친다고 해도 길거리에서 호떡 하나를 사 먹는 즐거움도 잃어버린 2년의 시간을 돌려줄 수는 없다. 직장을 잃고 일상을 잃어버린 피해자의 회복은 너무도 더디다. 더욱이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공고한 이 사회에서, 안희정의 권력이 여전히 살아있고 추종자들은 지금도 피해자를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대고 있으니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진짜 ‘김지은’을 만나길 바란다.
나와 닮았고 당신과 닮은 그 얼굴을 다시 응시해 주길 바란다.
그를 위로했던 문장들이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거칠게 만드는 의심과 혐오를 ‘나긋이’ 잠재우기를 바란다.
책 속에는 사건 진행과정과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사람들과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김지은의 목소리가 되어주려 애쓴 사람들도 있는 반면, 한쪽에는 안희정을 위해 김지은 씨를 폄훼하고 업무 내용을 왜곡하는 증언을 한 뒤에 국회의원실과 모 기관에 자문위원 등으로 참 오비이락 같은 취직을 한 사람들도 있다.
[김지은입니다]는 성폭력 피해자를 둘러싼 거대한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김지은 씨의 개인 에세이지만 한 편으로는 2018년 시작된 미투 운동의 이면을 다시 보는 책이니,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