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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매이 May 06. 2020

나는 아니 우리는 마녀야, 뮤지컬 [리지]

보든 부인의 티타임이네?

연기가 피어오르는 티포트를 들어 올리며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가 나긋하고 몽환적인 넘버를 부른다. 그 뒤에서 불안한 눈빛의 또 다른 여배우는 두터운 책을 읽고 문장을 읽어나간다.


"청산은 포유류에게 가장 치명적인 독 중 하나이다."


[가내상비독약서]에 담긴 청산의 속성은 다시 노래가 되고 티포트를 든 하녀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진다. 그러는 사이 티포트와 찻잔에서는 계속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 속에서 두 여배우는 우아한 춤을 함께 춘다.


그곳은 '거칠고 아름다’ 운 복수의 주문을 적어 내려가는 마녀의 실험실.

객석의 관객들도 그 몽환에 빨려 들어간다.

무대 위의 마녀들과 무대 밖의 마녀들은 그렇게 한 편이 된다.




뮤지컬 [리지] /드림아트센터 1관 / ~6.21


뮤지컬 [리지]는 이미 TV시리즈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미국의 보든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리버에서 부유하고 명망 높은 보든가의 가장 앤드류 보든과 그의 아내 에비 보든이 처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다. 부부의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다름 아닌 둘째 딸 리지 보든.

사건 당일 리지가 2층에서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왔다는 하녀 브리짓의 증언, 언니인 엠마와 드레스를 태우는 것에 대해 대화했다는 이웃 앨리스의 증언, 그리고 리지는 스스로 알리바이를 계속 바꾸어 더욱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도끼는 손잡이가 잘린 채 발견되어 결정적인 물증은 없었다.


무엇보다 배심원들은 좋은 집안의 젊은 여성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리지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고)가, 법정에 살인 사건의 증거물이 등장하자 기절하고 마는 연약한 여성이 이토록 잔인하게 부모를 살해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검사님 말씀은... 모든 고귀한 남성들이 숭배하고 모든 관대한 남성들이 사랑하며 모든 현명한 남자들이 은혜를 입었음을 인정하는 '그' 성별인 리지 양이
욕망과 분노, 힘 그리고 집요한 증오를 가지고 도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 판단은 존경하는 배심원단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뮤지컬 [리지] 2막, 브리짓 설리번의 대사


배심원단의 판단은 '무죄'였다.

그 후 리지는 아버지의 막대한 부를 물려받고, 자신의 재력에 걸맞게 상류층이 모여 사는 거리로 이사 갔으며 결혼하지 않은 채 살다가 이후 유산을 동물보호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리지를 의심했다.

Lissie Borden took an axe
Gave her mother forty whacks
When she saw what she had done
Gave her father forty-one

(*미국에서는 동요처럼 불린다고 한다. 뮤지컬 [리지]의 넘버에도 포함되어있다)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리지를 진범으로 전제하고 쓰였다.

진범이 잡히지 않아 미제로 남은 살인사건.

누가, 왜, 어떻게 죽였나 하는 의문에서 우선 그 '누구'를 리지 보든으로 놓고 '왜'에 해당하는 서사를 쌓아가는 것이다.


리지 보든은 왜 아버지와 계모를 살해했는가.

그 답을 많은 창작자들은 여성 억압적인 시대적 배경과 폐쇄적인 보든가의 분위기에서 찾았다.


앤드류 잭슨 보든, 기가 막힌 구두쇠
어제 쩌먹은 양고기, 오늘은 구워 먹어
내일은 튀겨 먹고 모레는 스튜를 끓여
결국 탈이 나지 이놈의 보든

이층을 나누는 커다란 벽, 계단도 따로 써
자매는 앞쪽에 살고, 부부는 반대쪽에
서먹하다기보단 좀 복잡하달까
조용할 날 없지 이놈의 보든

 - 뮤지컬 [리지] 1막 'The house of Borden'


앤드류 보든은 장의사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상류층이 사는 언덕 위가 아닌 일반 주거지역에 살았으며 사진으로 남아있듯 주택도 소박했다. 이 때문에 두 딸이 자신들에게 걸맞은 사교그룹에 끼지 못했다는 게 주변인들의 평가. 또한 첫째 딸 엠마 보든은 계모인 에비를 싫어해 '보든 부인'이라고 불렀고, 리지 역시 아버지가 에비 보든의 이복동생에게 인근에 집을 사준 뒤부터는 에비를 더 이상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보든가에 침입 흔적이 없는 도난 사건이 발생한 뒤, 부부의 침실과 두 딸의 침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차단되고 출입문도 따로 썼으며 식사 조차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리지와 엠마 모두 서른이 넘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것도 앤드류 보든이 결혼 비용을 아까워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앤드류 보든이 억압적인 가부장이었다는 증거는 이렇듯 곳곳에 있다.

뮤지컬 [리지]는 여기에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더한다.

리지뿐 아니라 엠마와 브리짓 역시 가부장제와 남성(앤드류 보든)의 욕망에 도구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1막 초반에 풀어내면서 그녀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서로 도와 범죄를 은폐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재현의 윤리를 고민해야 하지 않나... 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실로 밝혀진 적 없는 친족 성폭력을 넣는 것이 과연 옳은가. 아니 그전에 법정에서 무죄를 받은 리지 보든을 살인자로 확정하는 건 또 괜찮은가.


그러나 극에 한정해서 봤을 때, 뮤지컬 [리지]는 너무 짜릿하다.

가부장제의 억압과 착취를 도끼로 끊어내는 여성 주인공이 있고 피 묻은 손을 마주 잡아 죄를 나눠 가지는 여성 연대가 있다. 언니인 엠마는 재산 욕심을 숨기지 않고(물론 여성들이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니 이 정도는 생존 욕구로 봐도 될 듯) 친구인 앨리스는 성애를 거칠게 드러내는데 이러한 여성 캐릭터들은 2020년에도 여전히 신선하다.

특히 앨리스의 욕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리지와 엠마, 브리짓은 앤드류 보든의 직접적인 피해자로 그려지지만 앨리스에게는 그런 피해 서사가 없다. 그는 단지 리지를 욕망한다. 아버지의 폭력, 언니 엠마의 부재, 들끓는 복수심으로 혼란에 빠진 리지를 끌어당기며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던 앨리스.  

그랬던 그가 사건을 인지한 초반에 '날 위해 거짓말을 해 줄래?'라는 리지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으로 2막에선 새로운 갈등과 긴장이 생긴다.  

펑키한 옷으로 갈아입고 푸른색 조명 아래 서 있는 세 명의 여자- 엠마, 리지, 브리짓은 자유를 갈망하며 서로의 손을 잡는데 앨리스는 여전히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노란색 조명 아래에서 그들을 심란한 듯 바라본다.


있어 줄래? 내 곁에
그늘에 누운 채
입술 틈에 열매를 따스히 베어 문 채

- 1막 앨리스 러셀의 넘버 'Will you stay?'  
날 위해 해 줄래?
혀끝을 가만히
입술 틈에 진실을 다정히 베어 문 채

-2막 리지 보든의 넘버 'Will you lie?'


오로지 본 대로 진실을 말하겠다던 앨리스. 그런데 법정에서 그의 태도는 참 묘하다.

그는 무척 갸륵한 표정을 짓는데, 검사의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고 진실에 가깝게 답하려는 듯 하지만 엠마와 브리짓에 의해 중요한 사실 전달이 가로막혀도 어쩐지 아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는 '리지 보든이 불태워 없앤 드레스에는 살인의 증거인 피가 묻어있었나?'는 중요한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다. 판결의 향방과 함께 리지의 운명까지 바로 그의 입에 달린 셈이다.

앨리스는 어쩌면 이 상황을 만끽하고 있는 듯 보였다.

검사에게 답할 때 앨리스가 짓는 유순한 미소에는 기만이 엿보이고 불안한 자유를 노래하는 리지를 향한 눈빛은 노골적인 욕망으로 번뜩인다.

그의 목적은 리지를 벌주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리지가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만드는 것. 그러니까 연인인 리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라니! (아니, 욕망은 당연히 자기중심적이지.)

그래서 나는 앨리스라는 캐릭터를 너무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그를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자각하여 추구하는 여자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누구나 마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앨리스 역시 모종의 목적을 달성한 뒤, 갑갑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세 여자와 손을 잡는다.

욕망하는 네 명의 마녀들은 함께 자유를 노래하며 극은 끝난다.

 

강렬한 록사운드, 추억에 젖게 하는(... 촌스러운) 펑키한 2막 의상, 좀 소심하게 표현됐지만 잘 어울리는 B급 정서의 연출까지... 볼 수록 매력적인 극, 뮤지컬 [리지].   




사실 나는 개막도 하기 전에, 보기도 전에 이미 뮤지컬[리지]을 사랑했다.

오직 여성 캐릭터만 나오는 극이고 여성 배우 여덟 명만 캐스팅된 극이니까.   

오프닝데이(사실상 프리뷰 공연에 가까웠지만 양심 없는 제작사는 라이선스 초연 개막 공연을 패키지로 팔아먹었고, 나는 얼른 샀다.) 첫 공연을 보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기량을 뽐내는 네 명의 여성 배우들을 보는 것만도 너무 좋아서 주책없이 울컥했다.


극 중 네 명의 캐릭터들과 이를 연기하는 여덟 명의 배우들 하나하나 짚어서 후기도 이어서 쓰고 싶다.

그러려면 이 극을 안 본 사람이 없어야... 스포일러 걱정 안 하고 쓸 텐데...


1. 락 뮤지컬을 사랑한다면 2. 록음악을 사랑한다면 3. 90년대 펑크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4. 그리고 여성 서사를 찾고 있고 5. 도덕 없는 여성 캐릭터를 아낀다면 6. 약간의 병맛을 애호한다면 7. 요즘 뭐 재밌는 뮤지컬 없나~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중에 하나라도 해당하면 보자 [리지]!


뮤지컬 [리지] 오프닝데이 패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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