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오퍼> 201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 번쯤 일생일대의 사랑을 꿈꾼다. 그래서 많은 영화들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펼쳐 우리를 현혹시키지만, <베스트 오퍼>는 그 달콤함 뒤에 숨겨져 있는 잔혹한 진실, 즉 사랑의 진짜 얼굴을 우리에게 들이민다. 바로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정도의 고통이다. 그렇게 영화는 묻는다. 이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사랑을 할 자신이 있느냐고 말이다.
가난한 고아였던 '버질 올드만(제프리 러쉬)'은 세계 최고의 경매사가 되어 돈과 성공,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생일을 함께 보낼 이가 단 한 명도 없다. 단골 레스토랑에서 건넨 생일 케이크는 위에 조촐하게 꽂힌 촛불 하나처럼 홀로 늙어가는 자신을 더욱 실감케 할 뿐이다. 결국 그는 케이크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자리를 뜬다. 그런 그의 취미는 다름 아닌 장갑 수집. 타인과 세계, 그 무엇과도 닿지 않으려는 그의 결벽증을 잘 보여주는 취미다. 타인을 대하는 그의 표정과 태도 역시 언제나 차가운 경멸과 거리감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타인을 기피하는 것 같았던 그의 취미 뒤에는 정작 타인, 즉 여성에 대한 엄청난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장갑 서랍장 뒤에 방 한가득 들어간 여성의 초상화들이 바로 그 증거다.
물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건 살아있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인간의 병적인 증후라고 했던가? 적어도 버질 올드만 씨에게는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그는 살아있는 여성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여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만큼, 두려움도 컸노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가 시선을 맞출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 화폭 속 여성들 뿐이다. 장갑을 끼지 않은 그의 살갗에 닿는 것이 그림 뿐이듯, 그의 세계는 그렇게 액자 속에만 갇혀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손님이 찾아온다. 제갈량도 아니고, 그를 삼고초려시킬 뿐더러 얼굴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는 손님. 그러나 얼굴을 마주할 수 없는 손님은 인간 여자와 마주할 수 없는 버질에게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급기야 버질은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손님과 눈빛을 마주하고픈 열망에 시달린다. 그렇게 그는 일생일대의 사랑에 빠진다.
이쯤에서 이 영화의 비밀, 즉 반전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버질에게 찾아온 이 운명적인 만남은, 사실 철저히 설계된 함정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유일한 두 친구인 '빌리(도날드 서덜랜드)'와 '로버트(짐 스터지스)', 그리고 그 둘에게 섭외되었을 '클레어(실비아 휙스)'에 의해서다. 아마도 이 계획은 버질이 자신을 친구로서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거나 지지해주지 않고, 그저 초상화를 사는 도구로 이용해온 것에 대한 빌리의 앙심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버질을 가까이서 수십 년간 지켜봐왔고, 초상화를 조달해주며 그의 은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아는 것은 빌리뿐이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빌리의 계획은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다. '내면의 신비' 타령을 하는 버질에게 신비로운 여주인공 캐릭터를 설계해 속여낸 것을 보라! 결국 운명적인 사랑으로 포장된 이 계획된 사랑은 진품과 위조, 1류와 2류를 구분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버질에게 보내는 빌리의 반격이다. 친구에게 가장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저리 치밀한 계획을 짜다니, 애초에 저런 앙심을 품게 만든 버질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클레어를 만난 버질은 그녀의 '광장 공포증'을 고치기 위해 60년 인생 처음으로 머리를 굴리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이때 버질이 예순의 몸으로 수십 번 땀을 뻘뻘 흘리며 집을 오가는 모습은, '사랑'이란 엄청난 신체적·감정적 노동임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사실 이 계획은 버질을 그의 아름답고 안전한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버질은 땀을 닦기 위해 장갑을 스스로 벗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버질은 스스로를 집 안에 가둔 클레어를 통해 방 안에 갇힌 자신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이때 클레어와 버질이 소통하는 작은 구멍이 하필 '새'의 날개가 그려진 곳에 위치해있단 점도 지나칠 수 없다.
무엇보다 버질의 '타인 기피증'을 해결하기 위해, 클레어의 '광장 공포증'을 생각해낸 빌리의 발상은 심리학적으로도 상당히 설득력있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일 때 인간은 보다 객관적인 사고를 하게 되며, 무엇보다 타인이 나보다 더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을 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정작 자신이 환자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의사가 된 것처럼 클레어를 치유하려고 뛰어드는 버질을 보라. 그래서 버질은 클레어의 치료를 도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함께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나간다. 이때 클레어가 첫 애인으로부터 낯선 곳에 버려진 상처로 인해, 집 안에만 생활하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버질의 '타인 혐오'가 다름 아닌 '타인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고독을 가장 먼저 선택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상처받은 자의 선택지다.
물론 클레어의 고백은 빌리가 짜준 '대사'였겠지만, 이 말을 들은 빌리는 자신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고아원에서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국 클레어의 대사는 빌리의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일종의 질문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고자 하는, 혹은 자신과 닮은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의 심리를 자극한 것이었다. 화폭 속 여인들만 닿았던 버질의 살갗에, 난생처음으로 가닿는 클레어의 살아있는 육체. 그렇게 버질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인의 따뜻함에 온 몸을 맡긴다. 그것은 그가 이제까지 '행복'이라 속여왔던 딱딱하고 딱딱한 화폭의 질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자신이 지금껏 죽은 채로 살아왔다는 것을. 모든 것을 안다고 자만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모르고 살아왔음을.
한편 빌리는 버질이 클레어와 사랑에 빠지게 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자주 찾아가게 만들 미끼로 보캉송의 '말하는 기계' 부품을 클레어의 집 곳곳에 뿌려놓는다. 이때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기계' 안에 난쟁이가 숨어있었다는 로버트의 대사는, 로봇처럼 숫자 계산을 하던 난쟁이 여인이 이 영화의 해답을 쥐고 있음을 가리키는 복선이다. 그렇게 빌리와 로버트는 배신의 증표로 버질에게 각각 그림과 로봇을 선물한다.
<베스트 오퍼>를 다시 보며 필자가 가슴 아팠던 부분은 사랑하는 연인, 클레어의 배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두 친구의 배신이었다. 그중에서도 원한이 있는 빌리야 그렇다쳐도, 왜 로버트까지 버질을 배신했을까? 수많은 여자들을 거느린 젊고 잘생긴 로버트는 버질이 갖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이다. 마지막에 난쟁이 여인마저 로버트에게 반해 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음으로써 버질을 더욱 좌절케도 한다. 결국 버질을 배신하고 조롱하며 떠나는 로버트의 모습은, 버질이 느끼는 '젊음'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버질은 로버트가 가진 젊음으로부터 그러길래 늙은이가 왜 다 늦어서 사랑을 탐내냐고, 젊었을 때 좀 더 용기있게 살지 그랬냐는 속삭임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극 중 버질은 진짜 같아보이는 예술작품이 '위작'임을 날카롭게 판별해낸다. 이때 위작이라는 증거가 다름 아닌 여성의 눈동자 속에 그려진, 여성 작가의 사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클레어 역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했단 것만은 기억해달라"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완벽한 가짜'에 '진짜의 일부'를 섞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질은 그녀의 그 말 한마디에 희망을 걸고,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린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도, 그녀의 말조차 거짓이었음을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이때 그 기다림의 장소를 '밤과 낮'으로 지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작명 센스란!
그러나 그녀의 말이 진심이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가 진정 버질을 사랑했다면, <아가씨>의 숙희가 그랬던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연극임을 고백하고 함께 떠났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버질 대신 돈을 택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버질이 모든 걸 버리고 함께 떠나게 만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내 인생을 파괴하러 온 구원자"라는 그 유명한 <아가씨>의 대사처럼 사랑은 완전히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그 이전엔 '파괴'가 수반되어야 한다. 결국 버질이 안전하고 아름다운 감옥을 빼앗기고, 가슴에 평생 잊히지 않을 칼이 꽂힌 것은 알을 깨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고통이었을 것이다. 슬픈 건 젊은이는 그 상처를 회복하고 다시 일어날 체력과 시간이 있는 반면, 버질은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이다. 최대한 어렸을 때 많이 경험하고 상처입어보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그러나 난 버질의 상처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버질은 모두가 짝이 있는 세상에서, 홀로 맞은편 상대를 찾아 끝없는 기다림 속에 남겨진다. 이는 겉으론 레스토랑에 홀로 앉아있었던 첫 장면과 똑같아 보이지만, 우리는 두 장면이 천지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 속에 갇혀 흠 하나 없던 버질과, 알을 깨고 나온 상처투성이의 버질. 그리고 후자의 버질은 세상을 모두 얻고 다시 모두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으며, 평생을 기다릴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다. 그것만으로도 버질의 고통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비록 그것이 죽을 만큼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난 버질의 앞모습에서 <데미지>의 주인공, '스티븐'의 뒷모습을 본다. 영국의 장관으로 모든 걸 가졌던 그는 사랑에 빠져선 안될 여인과 만나 모든 걸 잃고, 거지 차림으로 도시를 떠돈다. 그리하여 그가 오직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여인과 자신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당시 내게 무척 절망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와 버질이 진심으로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나 만년해로가 아닌, 이별과 고통 그리하여 다시 홀로 남겨지는 고독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모든 걸 경험하고 견딘 스티븐과 버질은 비로소 사랑과 인생의 정수를 체험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베스트 오퍼>는 '사랑이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면'이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로버트는 '만약 그렇다면 경매도 되겠다. 최고가를 내세운 사람이 최고의 사랑을 경험하는 거다.'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 최고가라 함은 다름 아닌 인생 전체다. 과연 사랑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 대답은 '물론'이다. 주인공이 '최고의 경매사'라는 점 자체가 힌트가 아니겠는가.
오히려 이 영화가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당신이 과연 그럴 만한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작 진짜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인생 전체를 내던질 각오가 된 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버질은 모든 걸 잃음으로써 모든 걸 얻는 사랑이라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타자의 정의를 완성한다. 타자란 치명적이지만, 그래서 더없이 멋진 지옥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