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수파 Oct 30. 2019

씨네필이라면 꼭 관람해야할 영화

<씨네필> 2017


"여전히 영화관에 가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 마리아 알바레즈 감독


씨네필이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을 가진 <씨네필>은 말 그대로 씨네필들의 삶이 담겨진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때 그들이 영화광이라는 것 외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나이 든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극장으로 향하고, 상영시간표를 확인하고,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들. 특히 바다를 보면서 프랑소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를, 석양을 보면서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을 떠올리며 극장 바깥에서도 세상을 영화의 눈으로 보는 그녀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씨네필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화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그녀들에게서 현재의 자신을, 그리고 미래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각각 스페인,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 사는 세 명의 할머니들은 모두 스타일이 다르다. 그 중에서 특히 동질감이 느껴졌던 건 가장 활동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노르마' 할머니다. 집엔 영화 서적이 가득하고,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감독에 대해 공부하며, 영화제를 갈 준비를 하다 보고 싶은 영화를 못보게 될까봐 발을 동동 구르고, 보기 어려웠던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황홀해할 뿐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했던 장소를 찾아가기까지 하는 그녀. 특히 영화제 카탈로그를 보며 극장 거리까지 철저히 계산하면서 시간표를 짜는 모습은 실제 이 영화가 상영되던 영화제에 방문해 관람하던 관객 모두가 깊이 공감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가 던지는 대사들 역시 인상깊은 말들이 많다.


"회사원들은 하루에 8시간 이상씩 매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을 보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8시간 동안 무려 4개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죠. 그래서 난 영화가 좋아요."


"씨네필과 관객은 달라요. 영화 표를 사기만 하면 누구나 관객이 되잖아요. 반면 씨네필이란 토요일 3시 30분에 62분짜리 영화 한편을 보려고 시네마테크까지 뛰어가는 사람이에요. 그러고나선 다음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극장으로 가는 사람이요. 사전 정보를 공부해두는 것은 필수구요."


"누가 언제 영화 보기를 그만둘거냐고 물어보면 난 어떻게 그걸 그만둘 수 있냐고 되물어요. 어떻게 영화 보기를 그만둘 수 있죠? 영화관에 가지 않으면 대체 뭘 해요?"



미용실에서 앞머리를 다듬으며 등장하는 '루시아' 할머니 역시 매력이 넘친다. 죽는 순간에도 매력적인 시체가 되겠다며 자기 관리를 멈추지 않고, 남성에 대한 아직 식지 않은 욕망을 드러낸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성성을 잃지 않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 과연 남성편력도 있어보였는데, 특히 포스터 속 사진의 주인공이 그녀의 남편이래서 깜짝 놀랐다. 아무리 봐도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를 빼닮아서, 그녀의 말이 진짜였는지 아직도 의심 중이다. 그렇게 영화는 미스테리 요소까지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가장 웃음 타율이 높은 대사를 던졌던 것도 그녀였는데, 특히 "정신과 의사는 환자들을 다 시네마테크로 보낸단 얘기가 있어요. 극장엔 과부, 독신녀, 이혼녀들이 대부분이죠. 그리고 다들 성격이 고약해요."라고 말하며 자신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뒤에 바로 길바닥에 떨어져있던 종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치우는 장면을 붙인 편집도 깨알같다.


"사실 난 일본 영화를 별로 안좋아해요. 지나친 남성주의에, 이상한 사랑을 하고, 여자는 매일 고통받고 그러잖아요."


"인도에서 내 전생이 고양이였대요. 고양이는 자연에서 유일하게 무리는 짓지않고 혼자 사는 동물이죠. 지금까지 제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보면 고양이였던게 맞는것 같아요."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나는 죽어서 더이상 못봐도, 사람들은 영화를 통해 날 볼테니까요. 저 할머니는 대체 누구야? 하면서 말이죠. 결국 사람은 누군가 기억해줘야 존재할 수 있는거니까요. 아무도 날 기억해줄 사람이 없었는데, 이젠 영화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됐어요. 이게 다 감독님 덕분이에요."



내내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극장에 도착해서야 이내 미소를 지어보였던 '팔로마' 할머니는 어딘가 가장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모든 씨네필과 노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씨네필과 노인의 공통점. 바로 외로움이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들은 기쁘게 자신이 재밌게 봤던 영화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집에 기꺼이 초대해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줄곧 자신의 삶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주고, 말을 걸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루 종일 말을 안하다가 극장에 가면 적어도 듣기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영화가 중간중간 비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독하고, 연기 수업을 다니는 할머니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지독하리만치 고독한 노년을 어떻게 견뎌내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한 할머니는『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 글귀를 읊는다. "현재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시간의 결과입니다. 과거의 축적이죠. 과거는 결코 어디로 가지 않아요." 그래서일까. 루시아 할머니가 죽은 남편을 이야기하며 그의 사진을 쓰다듬을 때, 사진첩에 본인의 얼굴을 모두 지워넣은 남편에 대해 "자기 인생이 싫었던 거죠.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던 거에요." 라고 말하는 팔로마 할머니의 모습에선 그녀들 뒤에 수많은 사연과 시간들이 쌓여져 있다는 느낌을 안긴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르마 할머니의 말대로 그것들을 토대로 각자 영화를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결국 극장이란 장소는 각자의 삶과 영화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감독이 '영화'에 대해 묻자, 팔로마 할머니와 노르마 할머니는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영화는 탈출이죠. 잡생각이 안나요.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어요." VS "뭔가를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바탕으로 내 시선을 만드는 거예요. 세상과 만나는거죠. 영화는 그 점에서 융합이자 참여지, 도피가 아니에요. 제가 뭘 피하고 싶겠어요?" 그러나 사실은 둘 다 맞는 말이 아닐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것. 영화는 이 두가지를 동시에 가능케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시간과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해서 영화를 본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영화가 이 세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다.

작가의 이전글 모든 것이 떠나간 순간, 나는 춤을 추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