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수파 Oct 30. 2019

모든 것이 떠나간 순간, 나는 춤을 추기로 했다

<글로리아 벨> 2019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년이 된 '글로리아(줄리앤 무어)'의 삶에선 많은 것들이 계속 떠나가고 있다. '우린 언제나 한 팀'이라 외쳤던 친구는 퇴사해버리고, 이혼한 남편은 새 배우자를 만났고, 아들은 자신의 가정을 꾸렸으며, 딸마저 스웨덴이라는 먼 이국으로 날아가버렸다. 심지어 눈도 평생 안약을 쓰지 않으면 실명될 정도로 노화된 상태다. 그렇게 시간은 엄마의 말마따나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버렸고, 글로리아는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사막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점에서 스핑크스를 닮은 사막 고양이가 자꾸 그의 집에 쳐들어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몸의 세포가 10년 마다 다시 탄생된다'고 말하는, 고로 나이에 상관없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믿고 싶은 글로리아는 끊임없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고양이와 외로움을 내쫓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를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매일 밤 중년 클럽에 찾아가, 외로움을 쫓아줄 연인을 물색하는 것. 그리하여 '아놀드(존 터투로)'가 그의 삶에 입장해온다.


자식들이 일찍 품을 떠나 외로운 글로리아와, 반대로 자식들이 독립을 하지 못해 버거운 아놀드는 중년 세대가 겪을 법한 고민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커플이다. 거기다 '아내와 이혼한 거지, 자식과 이혼한 건 아니지않느냐'는 아놀드의 말마따나, 둘의 감정이 깊어질 만하면 끊임없이 각자의 가족들이 발목을 붙잡는다. 청춘들처럼 사랑에 모든 걸 바치기엔 그들은 책임져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결국 가족들과 사진과 추억을 곱씹는 글로리아와, 중요한 순간엔 언제나 가족으로 돌아가는 아놀드의 모습은 왜 중년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어려운가에 대한 이유일 것이다.



평생 가족을 책임져왔고, 아직도 사실상 책임지고 있는 아놀드는 또다른 책임 따윈 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에게 죽어도 글로리아의 존재를 알리지 않으며, 글로리아의 삶에서도 본인이 내킬 때마다 퇴장하고 입장하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해골 인형을 마주한 글로리아는 그를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마도 '우리 모두 내일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다'는 딸의 말을, 우리에겐 사랑할 시간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리라. 그러나 야심차게 출발한 여행은 도착하자마자 삐그덕거리고, 결국 글로리아는 차갑고 공허한 라스베가스 한복판에서 홀로 눈을 뜬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글로리아는 '흉측하다'고 기피했던 고양이를 키우고, 시끄러워했던 윗층의 소음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아버린다. 그때서야 글로리아는 남자로도, 로맨스로도, 그 무엇으로도 삶의 공허함을 매꿀 순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테다. 외로움을 집 안에 들이고,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갈 수 밖엔 없다는 걸 말이다. (그의 자식들이 결혼을 했음에도 자유분방한 배우자를 둔 탓에 외롭거나 불안한 상태로 그려지는 이유다.) 그리하여 친구의 등쌀에 무대로 오른 글로리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엔 다시 춤을 이어간다. 이전에 아놀드가 '항상 그렇게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글로리아는 '행복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고 답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럼에도 춤을 춘다는 것이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인생은 계속되는 것처럼. 결국 글로리아는 본인의 말마따나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도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사랑과 공허를 모두 끌어안고 인생이라는 춤을 출 것이다.



<글로리아 벨>은 '세바스찬 릴레오' 감독이 칠레에서 연출한 대표작 <글로리아>를 스스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 역시 미국에서 나오미 왓츠를 주연으로 <퍼니게임>을 자가 리메이크한 적이 있었다.) <판타스틱 우먼>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성한 그에게, 시나리오 제작 기간 없이 빨리 제작할 수 있는 영화라는 이유로 제안된 프로젝트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그 과정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대마초와 성형 수술을 추천하는 친구, 총기 소유에 동의하던 아놀드가 역으로 페인트총에 맞는 장면 등 감독이 바라본 미국의 모습이 추가된 부분은 꽤 재미있다.


이미 한번 만들어진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곳곳에 세바스찬 릴레오 특유의 섬세하고 노련한 연출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거기다 '줄리앤 무어'의 연기력과 매력이 무척 잘 담겨있으며, <판타스틱 우먼><디스비디언스>에 이어 또다시 함께 작업한 '매튜 허버트'의 비밀스럽고도 긴장감있는 음악은 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더 끌어올리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한스 짐머가 부럽지 않은 조합이다.) 무엇보다 <글로리아 벨>은 중년의 위기, 나이 든 모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고양이, 가깝고도 먼 자식 등 <다가오는 것들>과 많이 닮아있다. (글로리아가 공항에서 딸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선 <레이디 버드>도 떠올려볼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누구나 결국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해 <다가오는 것들>이 '철학'이라 답한다면, <글로리아 벨>은 '춤'이라 답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난 영화를 보며 '부모도 연인도 자식도 결국엔 다 왔다 가는 것일 뿐'이라던 나문희 배우의 말을 떠올렸다.



"관객이 극장을 가는 것은 배우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보기 위해서다.(The audience doesn't come to see you, they come to see themselves.)" - 줄리앤 무어

작가의 이전글 무엇이 작가를 작가로 만드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