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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 Jun 02. 2016

언젠가 당신도 알게 되겠지요

펠릭스 발로통, <저녁 식사, 램프가 있는 풍경>

저는 대가족에서 태어났습니다. 4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었어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고 저와 남동생 둘. 학교 친구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집보다 식구 많은 집이 없었어요. 할아버지는 식사는 무조건 가족 모두 함께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셨어요. 특히 아침식사는 가족 중 누구도 빠질 수 없었죠. 아침잠이 많아 밥 대신 잠이나 더 자고 싶었던 적도 많지만 할아버지에게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늘 먼저 일어나 식탁에 앉아야 했습니다. 


식사는 단순이 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었지요. 오늘을 계획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칭찬도 받고 야단도 맞는 그야말로 ‘우리 집 아침 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이었어요. 특히 저희 할아버지는 참 엄하신 분이었어요. 10원 한 푼도 허투루 못쓰게 늘 단두리 하셨고, 어려서 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글을 채 떼기도 전부터 밥상머리에서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왔지요.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제가 먼저 들면 호통을 치셨고, 아무리 급해도 먼저 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한 가지 반찬만 편식하는 건 절대 허용되지 않았고,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는지, 밥을 흘리지는 않는지 늘 감시하셔서 어린 마음에도 식사시간이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요.


젓가락질이 서툴렀던 저는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식사시간이면 늘 긴장했습니다. 젓가락을 바로 쥐려고 노력하면 음식을 흘리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편한 방식대로 하기엔 할아버지 눈길이 무서웠지요. 아마 그때 제 표정이 그림 속 소녀 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펠릭스 발로통, <저녁식사, 램프가 있는 풍경>, 89.5*57cm,  패널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스위스의 화가 펠릭스 발로통의 <저녁식사, 램프가 있는 풍경>은 4인의 식사 모습을 긴장감 넘치게 담았습니다. 자애로운 눈길로 딸아이를 쳐다보는 어머니와 왼손으로 빵을 움켜쥐고 정신없이 먹는 아버지와는 달리 맡은 편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네요. 커다란 뒷모습에서 힘이 느껴집니다. 그림 속 소녀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긴장한 표정을 쳐다봅니다. 스푼이나 포크를 쥐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식사를 다 마쳤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림 속에서 등을 보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노란 조명의 램프의 화사한 빛도 사내의 검은 뒷모습에 가려져 램프 속 고양이만 눈에 띌 뿐입니다. 아마 소녀는 등을 돌린 사내를 무서워하는 모양입니다. 마치 어려서 할아버지와의 식사를 겁내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네요.


하지만 추측컨대, 등을 돌린 사내는 무서운 사람은 아닐 거예요. 아직 어린 소녀에게 덩치 큰 사내는 공포의 대상일 수 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소녀를 사랑하는 그녀의 삼촌이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정도로 소녀를 아끼는 할아버지일 수도 있겠죠. 소녀도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겁니다. 등을 돌린 남자의 호통과 야단이 속마음과 다르다는 걸, 그저 수줍어서 다른 방식으로의 애정표현이었다는 걸 말이죠. 


저도 어느 순간 알게 되었거든요. 할아버지의 ‘골라 먹지 말아라!’는 ‘골고루 먹어야 잘 크지….’였고, ‘먼저 일어나지 말아라’는 ‘조금 더 이 할애비에게 얼굴 좀 보여다오’ 였다는 걸 말이죠. 우리 할아버지는 사실, 나를 엄청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소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될 때쯤엔 아마 남자가 많이 늙어 있을 테니, 그 전에 소녀에게 먼저 귀띔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좀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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