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우유는 김유석이라는 아저씨가 천안에서 10월 20일에 만든 거래. 근데 저 우유는 이름은 안 써 있네?”
마트에서 딸과 함께 장을 보는데 우유에 쓰인 생산자의 이름을 보며 이야기했어요. 언제부턴가 물건을 사면 만든 사람 이름과 만든 날짜 등 생산자 정보가 같이 적혀 있는 경우가 적잖이 있습니다. 일명 ‘생산자 실명제’라고 불리는 이 제도는 생산 과정에서 생산자들의 책임감을 높이고, 고객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라고 해요. 고객들의 신뢰가 중요한 구매 포인트가 되는 농산물이나 일반식품군에 특히 많이 적용되어 있죠.
하지만 전 이 생산자 실명제의 원조는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책’이에요.
책의 판권 페이지를 펴보신 적이 있나요? 보통은 책의 맨 마지막 페이지 또는 2페이지 정도에 있을 거예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어서 아마 일부러 눈 여겨 보지 않는 한 그냥 지나갔을 겁니다. 바로 이 판권에 책의 생산자들이 실명으로 주르륵 나열되어 있습니다.
어떤 회사서 누가 펴냈는지(출판사명, 펴낸이), 누가 쓴 책인지(지은이),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그린이), 누가 우리말로 옮겼는지는(옮긴이), 누가 편집을 했고(책임편집), 누가 디자인을 했으며(디자인), 누가 마케팅을 하고 있는지, 누가 제작 과정을 담당했는지는 물론 판권을 자세하게 작성하는 회사의 책들은 종이는 어느 회사 제품을 사용했고, 어느 인쇄소에서 찍었으며, 어느 제본소에서 제본을 했는지 등 아주 상세하게 생산자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사면 언제나 판권 면을 가장 먼저 펴보곤 합니다. 판권 페이지의 낯선 생산자들의 이름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뭉클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집니다. 특히 ‘책임편집’이라는 항목 뒤로 붙은 이름에 오래도록 시선을 두고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진심을 담아 인사를 하게 됩니다. 아, 물론 마음의 소리입니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건 사실이에요.
책임편집은 말 그대로 이 책을 책임지고 편집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기획도서라면 어떤 책을 만들지, 누구를 저자로 할지에서 시작해, 책이 만들어지는 전반에 참여했을 이 책의 담당자죠. 물론 원고를 쓰는 건 저자의 몫이지만 그 옆에는 저자가 지치지 않도록 쉼 없이 응원했을 편집자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더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 맞는지 끝없이 자문하며, 나은 것들 중에 더 나음을 선택하며, 한 권의 책을 만들었을 사람 이름 옆엔 ‘책임편집’이라는 묵직한 이름이 붙는다는 걸 알고 있어요.
출판사에 입사해 편집자 교육을 6개월가량 받고, 소속팀으로 첫 출근하던 날이 기억납니다. 편집장님께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는데, 편집장님이 웃으며 반겨주시는 게 아니라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표정으로 반겨주셨을지도 모르지만 너무 긴장해서 얼굴 표정은 차마 살피지 못했음을 밝힙니다.)
“열심히 할 필요 없어요. 잘해야 해요. 편집자는 열심히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독자는 이 책을 책임편집한 사람이 초짜 신입인지 10년차 베테랑인지 몰라요. 그저 한 권의 결과물을 완벽하다고 믿고 살 뿐입니다. 무조건 잘해야 해요. 열심히 말고 잘하세요.”
날카로운 인상의 편집장님 앞에서 한껏 어깨가 쪼그라들어 있었던 저는 편집장님 말씀에 땅으로 몸이 꺼져버릴 것처럼 바짝 쫄아버렸습니다만, 편집장님의 말씀 한 음절 한 음절이 마음에 아로새겨졌습니다. 15년쯤 지난 일이지만 저는 아직도 그때 그날의 긴장한 나를, 말간 얼굴을 하고 새로운 시작 앞 두려움과 떨림 사이에 서 있던 나를, ‘책임’이라는 말의 무게를 배우던 날의 나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날부터 일에 있어서의 목표는 무조건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할 때도, 다른 일을 할 때도 ‘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스케줄이 너무 바빴으니까’ ‘몸이 안 좋았으니까’ 이쯤이면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지 않았어요. 그저 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책임이란 이렇게 무섭습니다. 어렵습니다. 무겁습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누가 ‘책임’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이름 곁에 두려고 할까요? 그 이상의 보상이 분명 존재합니다. 책임을 진다는 건 마음이 뜨거워지는 일이기도 해요. 마음의 묵직함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크나큰 보람과 무엇으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의 뿌듯함이 결과와 함께 찾아오니까요. 그게 바로 ‘만드는 사람’이 계속해서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여러 회사의 우유 중에서 딸이 처음 골랐던 이름이 쓰인 우유를 두 개 골라 카트에 넣으며 아이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김유석 아저씨가 기른 소에게서 이 우유를 짰나보다. 이 우유로 하자. 아마 좋은 우유를 만들려고 정성껏 키우셨을 거야.”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름을 건다는 건 그런 거야. 무엇하나 허투루 할 수 없는 것, 내 이름이 붙은 건 뭐든 최고 이고 싶은 마음. 그런 게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