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 책 팔아보셨나요? 얼마 전까지 제가 읽은 책은 언제나 ‘최상’급 평가를 받고 중고로 판매되었지요. 시간의 흔적으로 인한 빛바램만 뺀다면 지금 당장 서점에서 사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컨디션. 밑줄이나 플래그 자국은커녕 펴본 흔적만 좀 있을 뿐띠지까지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경우도 많았죠.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을 파는 경우도 있었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읽은 책도 새것 같았죠. 특별히 책을 애지중지 어화둥둥하고 다녀서라기보다는 저의 책 읽는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책을 눈으로만 읽었어요. 밑줄을 긋는 달지 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든지 플래그를 붙인다던지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와, 이건 정말 끝내주게 좋다. 사무치게 좋아” 하고 호들갑 떨 수준 정도 되면 그 페이지를 사진 찍어두곤 했어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마저 아주 드문 경우였지만요.
그래서일까요? 읽고 나서 느꼈던 재미와 감동은 빛으로 속도로 휘발되었어요. ‘읽었지만 읽지 않았습니다’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책을 읽고 남는 게 하나도 없었죠. 독서 관련 책에서 밑줄 긋고 기록하며 적극적으로 책을 읽는 습관의 유익에 대해 숱하게 보아왔지만 ‘아니, 뭐 이렇게까지?’ 하는 삐딱한 마음이 되어 ‘읽는 동안 재미있었으니 되었다, 뭐가 더 필요한가’ 하며 저 자신을 합리화했어요. 가뭄에 콩나듯 블로그에 책 리뷰를 올리기도 했습니다만, 가뭄에 콩은 자주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이죠? 이런 저의 ‘깨끗한 책 읽기 습관’을 이제는 과거형으로 쓸 수 있어서요. 1년 전부터 조금 다른 독서를 하고 있어요. 계기는 몇 알 되지 않는 그 가뭄에 난 콩들 덕분입니다.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볼까, 하고 과거에 남겼던 글들을 읽어보며 비공개할 건 비공개 하고, 카테고리를 바꿀 건 바꾸며 정리하는데 유독 책 리뷰에 눈이 갔습니다. 제가 쓴 글 같지가 않았어요. 분명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읽고 쓴 감상은 낯설었습니다. 오랫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앨범 속 사진을 보는듯한 느낌이었어요. 시간의 필터 덕분이겠죠? 제가 남긴 기록이 어찌나 애틋하던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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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
‘30대의 나는 이런 문장에 마음이 움직였구나.’
몇 개 되지 않지만 그 기록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읽은 책이 얼마인데 왜 이것밖에 남기지 않았나 싶어 많이 아쉬웠어요.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죠. 우리 기억은 너무나도 유약하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독서에 있어 ‘남는 건 기록뿐’입니다. 물론 내 마음에도 남고 기억에도 남겠죠. 하지만 아주 조금 남습니다. 남는지도 모를 만큼. 개미 코딱지만큼 정도? 그것도 개미가 코딱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그 이후 저의 독서는 조금 달라졌어요. 작정했거든요.
‘기록을 남기며 읽겠다!’
일단 ‘제대로 해야지’ 하는 마음부터 버렸습니다. 40년 넘게 나라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알겠더라고요. 오래하려면 대충 쉽게 가야 한다는 것. 정석도 앞에만 까맣게 풀고, 연초 시작한 다이어리도 채 3월을 넘기지 못하고 중단하고, 운동은 장비 사다 지치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작심삼일의 아이콘이에요. 솔직히 길어야 삼일이고 머릿속 결심으로 그치기도 부지기수.
제가 뭐든 오래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물론 복합적인 이유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뭐든 각 잡고 멋지게 하고 싶어 했죠. 남들 보기 그럴싸하게 하려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정성도 많이 쏟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단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고, 제대로 하기보단 매일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을 위한 기록이 아닌 나를 위한 기록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에 남는 문장에 플래그를 붙이고 간단히 메모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처음 책에 메모를 할 땐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제 딸이 우 연필, 좌 플래그를 잡고 책을 읽고 있는 절 보고 “엄마 공부해?” 라는 말을 할 만큼 저는 진지했습니다.
책에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문장을 필사했어요. 필사를 위해 준비한 노트에 옮기기도 하고, 그 양이 많거나 조금 귀찮으면 컴퓨터에 디지털 필사를 하기도 했어요. 한 노트에 제대로, 예쁘게하자, 라는 생각 없이 그냥 그때 그때 편한 방식대로 했죠.
모든 책을 다 쓰진 못했지만 리뷰도 남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 위주로 인스타그램에 올렸어요. ‘읽었던 모든 책을 다 써야지’라고 마음을 먹었다면 아마 지금쯤 작년에 읽은 책에 대한 책을 기억을 헤집어가며 쓰고 있었겠지만 다행히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때 그때 부담 없이 쓰고 싶은 책만 썼어요. 그래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하는 가벼운 마음을 착장하고 말이죠. ‘각 잡고’ 증후군을 앓고 있던 저는 처음엔 이렇게 대충 하는 게 마음이 상당히 불편했지만 하다 보니 ‘뭐 어때? 안 하는 거 보단 백배천배 낫지’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백배 천배 나았고요.
기록을 하면 기억하게 되고 기억을 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을 저는 작년에 시작한 기록하는 독서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써놓다 보니 의도하지 않아도 그 책 내용이 필요한 순간에 생각이 나더라고요. 생각난 책의 내용 덕분에 일상에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고, 전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대단히 뭐가 달라진 건 아니지만, 본인은 알잖아요. 아주 사소한 변화들이지만 책을 통한 좋은 방향으로의 발전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물론 기록하지 않고 책을 읽어온 N십년간도 책은 저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왔지요. 하지만 기록하는 독서는 제 독서를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게 했어요. 서로 다른 책의 내용이 융합되며 나만의 깨달음이 생기는 경험, 책을 통해 더 어제보다 한걸음 나은 내가 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어요. 그동안 머리로만 알았던 책의 효용이 내 것이 되는 아주 뿌듯한 경험이었죠.
실천을 떠나 기록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하기도 하고요. 기록은 사진 같아요. 당장에 잘 나온 사진도 있지만 ‘내가 이것보단 낫지 않나?’ 싶게 이상하게 나온 사진도 있잖아요. 기록도 마찬가지. 내 마음에 꼭 드는 것도 있지만, 스스로가 실망스러울 정도로 잘 써지지 않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마저도 얼마나 애틋한지 몰라요. 앨범 속 별로라고 생각했던 사진을 몇 년 뒤에 봤을 때 ‘와, 이 때 참 젊고 예뻤네’ 하게 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설되게만 느껴졌던 기록들이 더없이 소중해집니다.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야기합니다. 책은 어려서부터 읽었고,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제대로 읽기 시작한 건 1년 전부터라고요. 1년 전 책을 읽고 기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독서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들어섰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간증하듯 이야기합니다.
아 근데 혹시라도 나중에 저를 만나게 되시면 이 질문은 피하셔야 할 거예요. 책 읽고 기록하기에 관한 한 “알겠어, 나도 한 번 시작해볼게”라는 말을 듣고서야 끝내는 뚝심 있는 전도사가 바로 저니까요. 분명 이야기했어요, 경고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