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람 Oct 19. 2024

나이는 또 나만 먹었지, 책은 안 늙어요

작년이던가, 채널을 돌리는데 영화 <세렌티 피티>를 EBS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거의 20년만이었어요. 스물한두 살쯤 아름다운 운명 같은 사랑을 그린 이 영화를 두근두근하며 봤던 기억이 났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때의 감정만은 또렷하게 떠올랐어요. 책장 깊숙이 넣어두고 오래도록 꺼내보지 않았던 먼지 쌓인 사진첩을 발견한 기분이었습니다. 반가워서 그대로 채널고정!


헙, 그런데 사진첩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참 많이 다르더군요.  <세렌티 피티>는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는데 화가 나더군요. 조나단과 사라, 두 주인공 너무 한 거 아닌가요? 각자 약혼자가 있는 상황에서 운명의 사랑 타령이라뇨. 하룻밤 그렇게 설레한 것으로도 모자라 7년 동안이나 못 잊고, 각자의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서로 다시 만나 어쩌자는 거죠?


저 같은 영화를 본 거 맞겠죠? 같은 영화인데 이처럼 다른 감상을 가지게 되다니 기가 막혀서 웃음이 튀어나왔습니다. 하긴 영화가 무슨 죄겠어요. 변한 건 영화가 아닐 테죠. 제가 변한 탓일 겁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부터일 거예요. 저는 20, 30대 시절 재미있게 봤던 책들을 틈틈이 다시 찾아 읽기 시작했어요. 재독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어요. 읽어야 할 책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굳이 같은 책을 또 읽을 필요가 있나 싶은 지극히 실용적인 생각 탓이었죠.


솔직히 읽었다곤 하지만 내용이 상세하게 기억 나진 않았어요. 좋았다, 재미있었다, 슬펐다 같은 단순한 감정의 기억만 가진 책이 더 많았죠. 물론 좋은 기억 그대로 두어도 좋겠지만, 궁금했습니다. 나는 어떤 책을 좋아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도 잊고 지냈던 과거의 나를 만나는 기분으로 봉인 해제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제 인생 소설이라고 20년 넘게 생각했던, 양귀자 작가의 <모순>. 고등학교 3학년 때 이 책을 처음 읽었어요. 요즘 나오는 양장 판본과는 디자인이 달랐는데, 순백색의 표지에 심플하게 제목만 적혀 있는, 당시로서는 눈에 띄게 세련된 표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문제집 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되었죠. 상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단숨에 읽었다, 안진진의 선택에 많이 놀랐다라는 것과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라는 한 문장이 20여 년 전 읽었던 소설에 대한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다시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용 때문은 아니고, 그때의 감상과 다시 읽은 감상이 너무 달라서요. 10대의 나는 한치의 의심 없이 안진진이 김장우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영규와의 결혼을 납득하지 못했던 거겠죠? 안진진이 김장우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영규와의 관계는 뜨뜨미지근해보였을 테니까요. 사랑이 결혼의 최우선 조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열아홉의 나와 달리 40대의 저는 처음부터 ‘나영규’랑 결혼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우랑 결혼하면 고생하겠네, 하는 낭만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없는 생각을 제가 하고 있더라고요. 명문장이 넘쳐나고 다시 읽어도 ‘내 인생의 소설’로 여전히 꼽을 만했지만 안진진의 선택을 바라보는 입장은 완전히 달랐죠.


<빨간머리 앤>도 다시 읽었어요. 이 책을 좋아해서 간간히 펼쳐온 바 있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는 처음이니 한 10년 만에 다시 읽었나봅니다. 앤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 캐릭터죠. 저에게도 역시 그렇습니다. 저 또한 앤에게 기대어 긍정적인 에너지를 많이 얻었죠. 특히 ‘내일은 아직 어떤 실수도 일어나지 않은 새로운 날이잖아요. 참 멋진 일 같지 않나요?’ 이 문장은 정말 좋아해서 자주 떠올리곤 했어요. 기운이 없을 때 ‘으쌰!’ 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 같은 문장이죠. 그런데 10년만에 다시 만난 앤은 다소 시끄러운 아이더군요. 익히 알고 있긴 했지만 얼마나 말이 많던지요. 머리가 쟁쟁거려서 마릴라 아주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가고도 남았습니다.


부모가 되어버린 탓일까요? 저는 앤이 아니라 마릴라 아주머니슈 아저씨에게 감정이입이 되었어요. 전에 읽을 땐 초록지붕집에 오게 된 앤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읽었을 땐 마릴라와 매슈가 앤을 만난 게 행운처럼 느껴졌어요. 마릴라와 매슈가 얼마나 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지가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읽는 내내 저는 마릴라와 매슈 역할을 번갈아해가며 앤을 보며 엄마 미소를 짓게 되더라고요. 꿈을 먹고 사는 사고뭉치로만 기억하며 지냈는데 우리 앤, 어찌나 잘 컸던지요.


<자기 앞의 생>을 읽던 스물 몇 살 때, 저는 읽으면서 내내 남은 페이지를 신경썼습니다.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이런 이야기라면 700페이지든 800페이지든 읽고 싶다, 책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자세한 내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고 어린 꼬마가 화자였다는 것만 떠올랐습니다.


다시 읽은 <자기 앞의 생>도 역시나 좋았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만, 처음 읽었을 때처럼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서 빨리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약해져가는, 죽어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부분을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그걸 혼자 감내하는 모모의 모습도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요. 전에는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나이 듦’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여전히 참 좋았지만 좀 다른 의미로 좋았어요.




책의 반은 독자가 완성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책이어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다른 책이 될 수 있죠. 한 권의 책을 열 명이 읽는다면, 각기 다른 감상이 더해져 10권의 책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한 권의 책에 대해 한 사람이 한 가지 감상만 가지게 되는 건 아니네요. 나의 생애 주기 중 어떤 시기에 읽느냐, 내가 어떤 기분일 때 읽느냐, 내 처해진 상황과 감정에 따라 이런 책도 저런 책도 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책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 10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여전히 같은 내용입니다. 변한 건 나뿐이겠죠. 사진 속의 내 모습만 달라져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사진 속 변화보다도 더 극적인 변화를 책을 읽으며 느낍니다. 10년, 20년 뒤에 읽는다면 지금과 또 다르겠죠?


그나저나, 이번에도 나이는 나만 먹었네요. 책은 안 늙어요. 나만 늙습니다. 하지만 그 나이 든 내가 싫지 않아요.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아버린 지금의 내가 갖는 감상들이 마음에 듭니다.


늙은 게 아니라, 낡은 게 아니라, 깊어진 거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쳐봅니다.



사진: UnsplashChristin Hu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