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자주 갑니다. 아이들과도 가고 혼자도 갑니다. 별일은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생길 일이 뭐가 있겠어요. 대부분 그저 고요한 시간을 보내다 평화롭게 돌아오곤 하죠. 하지만 가끔은, 아주 아주 가끔은, 잊지 못할 일을 겪기도 합니다.
그날도 그저 평범한 날이었어요.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섰는데 아이가 뭐 재미있는 거라도 발견했는지 저를 돌아 세우며 말했어요.
“엄마, 저 할머니 모자에 폴리 있어”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가보니, 할머니 한 분이 어린이용 선캡을 쓰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못되도 여든은 넘어 보이시는, 아이들 모자가 맞을 만큼 체구 작은 백발의 할머니. 어르신존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는 많이 뵈었지만 어린이열람실에 할머니 혼자 계시다니, 좀 의외긴 했습니다. 실례인줄은 알지만 뭐하시는지 궁금해서 부러 할머니 맡은 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이 책 읽어주면서 뭐하시나 살짝 봤는데 반듯하게 접은 달력 뒷면에 영어 문장들을 필사하고 계셨어요. 손바닥 만 한 휴대폰 화면을 보고 또 보며 진지하게 쓰시는 모습이 멋져서 자꾸 눈길이 갔습니다. 할머니께 인사 여쭙고 말을 걸고 싶었어요. 낯을 많이 가리고 넉살이 좋은 편도 못 돼서 상상으로 그쳤지만 마음으로는 몇 번이나 할머니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뭘 저렇게 열심히 쓰시는 거지?’
궁금해서 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아이 도서관 영어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가 되어 자리를 떠야 했어요.
그런데 잠시 후 아이 영어 프로그램을 하는 곳으로 할머니가 들어오셨어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박수 치고 호응하며 참여하시는 할머니.
휴, 이제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을 막을 재간이 없었어요. 전 완전히 반해버렸거든요. 그 할머니에게. 제 장래희망은 공부하는 할머니, 책 읽는 할머니인걸요. 어찌 안 반할 수 있겠어요. 거의 완벽한 롤모델을 만난 셈인 걸요. 길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연락처를 건네는 게 이런 마음일까요?이 기회를 놓치면 크게 후회할 것 같은 마음. 영어 프로그램이 끝나고 저는 걸고 말았습니다, 말을.
“할머니, 아까 밖에서 뭐 열심히 쓰시던데 뭐 쓰시는 거예요? 너무 멋지세요.”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와의 대화.
할머니 연세는 여든넷. 영어로 성경공부 하는 모임에 주말마다 가고 있는데 모임 준비를 위해 영어성경필사 중이셨다고 해요. 이날은 도서관 유아 영어프로그램이 있단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이집에서 봉사 중인데 아이들에게 영어로 어떻게 재밌게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차에 참고하려고 들어오셨다는 할머니. 할머니는 60세 때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영어를 처음 공부하게 되셨다고 해요. 그전엔 그저 자녀분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는 일이 바빠서 공부는 꿈도 못 꾸셨죠. 그렇게 뒤늦게 시작된 영어공부는 벌써 24년째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쭉 하실 거라고 합니다. 리스닝과 독해는 되는데, 스피킹이 어려워 어떻게든 원어민과 말해볼 기회를 호시탐탐 찾는다는 할머니. 어찌나 눈이 빛나시는지, 그 눈빛에 감동받아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누군가의 진심이 마음으로 전달될 때의 찡한 감동을 느꼈어요.
친구 분들이 놀리신대요. 나이값도 못하고 뭐하고 다니냐고. 좋은 거 먹고 좋은 거 보며 시간 보내기도 부족하다고. 근데 할머니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본인이 너무 좋으시고,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 또 뵈어요. 다음 주에도 꼭 오세요!”
아이와 함께 와 있는지라 더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뒤를 보니 할머니는 묵묵히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접힌 달력 반대편에 필사를 이어나가고 계셨습니다.
할머니의 열정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어요. 세상에나, 대체 나이값이 뭔가요. 그런 건 누가 정하는 건가요? 적어도 내가 정한 나의 언어는 아니잖아요. 가져야 하는 나이값이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저도 쭉 ‘나이값’ 못하고 싶어요. 뜨거운 마음으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나이 먹어감이 두렵지 않습니다.
무언가 도전할 때 마다,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스스로 자문하게 될 때마다, 나이를 이유로 용기가 나지 않을 때마다, 저는 도서관에서 만난 할머니를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나마나 ‘으쌰으쌰’ 힘을 내게 되겠죠? 세상에 어떤 책이 이보다 더 큰 깨달음을 줄까요?할머니와의 만남은 열 자기계발서 부럽지 않은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나저나, 도서관 자주 가다보면 그 할머니를 또 만날 수 있겠죠? 아직 여쭤보고 싶은데 많은데 말입니다.
여러분, 도서관에 가세요. 이왕이면 자주요. 도서관에 자주가면 종종 이런 좋은 일도 생긴답니다.
참, 할머니를 만난 날, 집에 와서 득달같이 남편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전하니 “너의 미래인가?” 하더군요. 그말이 어찌나 기쁘던지. 마지막 피자 한 쪽 누가 먹을 것인가를 두고 눈치전쟁 중이었는데 기분 좋게 남편 접시에 덜어주었습니다. 미래의 롤모델을 찾은 기념으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