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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휘 Sep 18. 2019

나를 잃어버릴 뻔 했다

[HIM] 10월호 수록 에세이

  입대를 하면서 우린 정말 많은 걸 잃는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 평범한 일상, 무한한 가능성이 담긴 기회, 자유, 즐거움, 머리카락까지. '국방의 의무'라는 이름 아래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 모든 걸 잠시 포기하는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무거운 발걸음과 착잡하고 막막한 마음으로 훈련소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머리를 빡빡 민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 할 말을 애써 묻어두는 듯한 사람들. 모두가 별 다를 것 없어 보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시뮬라크르의 홍수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이루고 있던 어떠한 요소들 또한 특별함을 잃고 구멍이 뚫린 튜브 속 공기처럼 빠져나가 흩어져버린다. 훈련소에 들어와 처음 마주한 거울, 저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낙인 받은 몸과 아직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 딱 두 가지만이 남은 나다.

  군대에서 우리는 한 명의 "인원"에 불과하다.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와는 상관 없이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주어진 일만 한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보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모두가 행운을 누리진 못한다. 원하는 보직을 받지 못한 나는 그 해 여름, 사상 최악의 폭염 속에서 살면서 만져본 적도 없는 삽을 쥐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땅만 죽어라 파야했다. 비쩍 말라서 힘도 없고 쉽게 지치는 나를 몇몇 선임들은 탐탁지 않아했고, 동기들마저도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들을 쏘아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가장 못하는 삽질 실력으로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다시 매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 사이엔 꽤나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군생활 초기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혹시나, 싫은 소리도 잘 하지 못해 무시당하는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 모습이 거품이 빠진 내 진짜 모습이 아닐까하는 의심이었다.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과 잘 지내온 건 전부 운이었나, 내 능력으로 얻은 건 얼마나 되었나,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엇이 진짜 나의 모습인걸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의 다른 모습을 알 수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참 억울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멋대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미웠다. 일병을 갓 달았을 때 즈음엔 이미 많은 것들이 내 손을 떠나갔고, 위태롭게 헐떡이고 있는 자존심 하나만이 남았다. 이것마저 잃으면 정말 다 잃는 거였다. 나는 나를 지켜야 했다.

  자존심은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있지만, 난 너희들의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다!" 이 믿음이 근거 없는 자기애가 되게 두어선 안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지금의 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약점인 체력을 메꾸기보단 원래 가지고 있던 강점을 기르는 게 더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더니 노력의 결과가 나타났다. 첫 휴가 때 친 토익시험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얻었고, 부대 내에서 실시한 독후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젠 무시당하는 일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가족과 친구들은 기쁘게 축하를 해주었지만 날 무시하던 사람들은 성과엔 눈길도 안 주고 오히려 내 약점을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모두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다는 게 이런 뜻인 걸까, 그때야 어렴풋이 알았다. 아무리 강해지고 똑똑해져도 결국 누군가는 계속 나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를 가지고 있겠구나. 그리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남들의 시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분명 어제보다 성장한 모습이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내가 세운 목표를 위해 매일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새 1년 반이 흘렀다. 버려지는 시간들을 주워 모아서 나를 단련하는데 썼다. 다른 사람들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성장했다. 부대에서 인기가 너무 많아서 쉽게 볼 수도 없었던 HIM에 내가 쓴 글이 실린다니, 상상이나 했을까? 

  새로운 출발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지나온 시간을 다시 돌아보았다. 다시 하라 하면 죽어도 안 할 만큼 힘든 시간이었지만(아직 좀 더 남았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얻었기에 후회는 없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통들로부터 나는 나를 지켜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거나 스스로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순간은 살다 보면 반드시, 그것도 여러 번 찾아온다.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모두가 이 불청객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믿는 구석 하나쯤은 마음속에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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