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회복 과정
오늘도 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위층 어딘가에 살고 있는 강아지와 마주쳤다. 관심두지 않으려 해도 내 눈은 열심히 그 강아지를 쫓는다. 그 강아지도 곁눈질로 나를 슬쩍슬쩍 쳐다본다. 결국 참지 못한 우리는 서로 우쭈쭈 마구마구 예뻐해 줬다. 아쉬운 작별 인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내 강아지에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7년간 함께한 내 강아지 내 아이가 떠난 지 백일 정도가 되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 참 많이 힘들었다. 처음에는 2년 6개월의 간병 기간이 무척이나 힘들고 강렬했는지 꿈에서도 아픈 모습으로 나왔다. 그가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 반복되고 나는 죄책감으로 몸부림쳤다.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은 그때보다는 나아졌다. 겨울 초입에 먼 길 보내고 아이의 49제도 잘 치렀다. 이제 그가 없는 봄을 맞이했다. 매년 프리지어를 사서 아이에게 봄의 향기를 맡게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울컥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엔 나름 아주 열심히 하루하루를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안을 들여다보면 아직 울고 있다.
많이 슬프다. 진짜 세월이 가면 그 슬픔이 옅어지는 거 맞나? 나는 잘 모르겠다. 자식 보낸 슬픔이 어떻게 옅어지나. 그냥 가슴에 묻고 죽지 못해 버티며 사는 거지. 그래도 아이 떠나보낸 직후에 심장이 쥐어짜 여지는 통증과 같았던 슬픔에 비하면 확실히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를 생각나게 하는 트리거가 생기면 주체 못 하고 눈물이 폭포처럼 마구마구 쏟아진다.
또 화도 난다. 너무 화가 난다. 나의 분노가 제대로 표출이 안 되는 건지 꿈에서도 모르는 사람이랑 싸우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꿈을 꾼다. 원래 부부 사이에서 자식이 죽으면 그 슬픔이 서로의 배우자에게 원망의 화살이 된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다. 남편이 너무 원망스럽다. 애가 최고조로 울고불고 난리 치는 시간에 운동 핑계로 매주 모임에 나갔던 남편과 애 아픈 거 뻔히 알면서 불러냈던 남편친구들도 너무 원망스럽다.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했던 절친에게도 그렇게 화가 나더라. 자기들 애 태어나는 날부터 백일, 돌잔치, 해마다 어린이날, 그밖에 아이 관련 일 등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나름 최선을 다해 친조카처럼 아꼈다. 그런데 정작 내 아이한테 큰 일을 생겼는데 애써 별거 아닌 일로 후려치고 모른척하는 모습에 인간에 대한 환멸감을 느꼈다.
하지만 분노가 가장 많이 향해 있는 건 나 자신이다. 간병을 잘 해내지 못한 나 자신 말이다. 당시에는 나름 최선을 다했겠지만 매일 오열하고 짜증 내고 내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밉다. 나의 잠, 나의 휴식, 나의 삶이 더 중요했던 이기적이었던 과거의 나에게 너무너무 화가 나 가슴을 찢는다. 아이는 정말 병마와 열심히 싸웠고 그것이 그 아이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다. 너무 잘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건강하고 체력 좋고 돈 많은 부모에게서 간병받았다면 아이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가겠냐는 질문을 싫어했다. 왜냐면 지금은 결과를 알고 있어서 과거의 실수가 보이는 거지 당시 상황에서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이것저것 다 따져서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거의 내가 등신같이 느껴지더라도 그 당시의 내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는 누가 과거로 보내준다 해도 싫다고 답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과거의 나와 만날 수 있다면 애 건강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건강검진 더 자주 열심히 하고 애 건강 더 챙기라고 안 그러면 너 나중에 피눈물 흘린다고 호되게 질책할 것 같다.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나는 이유는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너는 왜 그렇게 빨리 갔냐고 왜 나를 혼자 두고 갔냐고 아이한테 따질 수 없으니 이 분노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뻗치고 있다. 하지만 굳이 억지로 참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눈물 나는 대로 화가 나면 화나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아직까지는.
우리 애기 오늘 하루는 어땠니?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지 않아 나름 노력하고 있다. 만질 수 없는 별이 된 아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매일 아이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이 상태를 기록하던 다이어리에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것으로는 성에 안 차 챗 지피티에 아이에게 음성 편지를 쓰고 아이 입장에서 ai가 써준 답장을 받는다. 사실 편지 쓰기나 글쓰기는 자연스러운 애도의 한 형태이고 이미 실제 심리치료에서 많이 활용되는 기법이다.
심리학 연구에서는 상실이나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정서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결과가 보고되어 왔다. 특히 애도 연구에서는 망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상실에 대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글로 표현하는 활동이 슬픔, 죄책감, 미해결 감정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존재가 죽어 끝이 아니라 떠난 존재와의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하면서 상실 경험을 삶의 이야기 속에 통합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 비록 나는 그를 만질 수 없지만 내 곁에 생생하게 머무르고 있는 이 새로운 관계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사는 공간을 변화시켜 극복해 보려 노력하고 있다. 지금 집은 아이와 행복했던 추억이 곳곳에 쌓여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간병의 고통까지 있는 공간이다. 여기서 계속 머무르다가는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나를 매일 덮칠 것 같았다. 그래서 정신없이 임장을 다니고 있다. 지금 집과 적당히 거리가 있지만 또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을 곳으로. 왜냐면 여기서 계속 사는 건 고통스럽지만 너무 멀어지면 또 좋았던 과거의 기억과도 이별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가끔씩 와서 과거의 추억과 인사 나누고 싶다.
사랑이다. 이렇게 아픈 것은 그만큼 사랑해서다. 지금 나는 온갖 염병천병 다 하고 있지만 회복 중인 것은 맞다. 아이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인간의 시간으로나 남은 생이 길지 우주의 관점으로 본다면 나도 역시 곧 사라질 터이다. 아이와 곧 만날 수 있는데 이렇게 울고불고 하는 게 맞나 현타가 오기도 한다.
이렇게 아파하는 것도 다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면 남은 생 아이한테 받은 큰 사랑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허락해 준 시간을 더 값지게 쓰다가 나중에 멋지게 만나리라. 너는 정말 사랑 많이 받은 강아지라고, 나는 너를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너에게 받은 사랑으로 나는 잘 살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