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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Jan 23. 2021

넉넉히 흔들리는 힘

[할아버지의 축복]레이첼 나오미 레멘

인턴 때 처음으로 내 환자분께서 돌아가시는 걸 보았다. 처음 뵀을 때부터 의식은 없었고 온갖 줄이 다 꽂힌 상태셨는데 결국 돌아가셨다. 주치의 선생님이 미리 DNR을 받아서 심폐소생술을 하진 않았고 돌아가시는 걸 지켜보았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바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는데 서서히 심장박동이 잦아들었다. 한참 뒤 심장이 멈추는 삐 소리가 들리고 주치의 선생님이 사망선고를 했다. 보호자였던 딸의 통곡소리는 조용하던 밤 병동을 가득 메웠다. 이후 나는 환자분의 몸에 꽂혀있던 줄을 하나 둘 빼고 구멍을 꿰맸다. 살이 점점 차가워졌다. 의식은 없어도 방금 전까지 숨을 쉬던 사람이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분이 계시던 병실 자리에 다른 환자분이 들어오셨지만 그 병실을 지날 때마다 그분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죽음은 정말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이별이구나. 죽음은 비가역적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이 박혔다.

이후 레지던트가 되어 주치의를 맡았다. 환자분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하셨다. 그냥 넋두리처럼 하는 소리라도 내 마음 속 깊이 죽음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난 죽고 싶다는 그 말이 무서웠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시라고, 어떻게든 낫게 해드리려고 노력하는 주치의 앞에서 그런 말씀하시면 힘 빠진다고 서둘러 환자들의 말을 막았다. 그런 내게 환자분들은 더 이상 죽음에 관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넉넉하게 그분들의 두려움을 받아내기엔 마음 속에 내 두려움이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가 인턴 때 내 환자분의 죽음을 본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죽음에 민감했다. 엄마아빠가 오시기로 한 퇴근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집 베란다에서 주차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언제 오느냐고 전화도 못했다. 그 전화 받다가 사고라도 날까봐. 서른이 넘은 지금도 부모님께서 농담으로 ‘아유 오래 살아서 뭐해. 때 되면 가야지’ 하시면 눈물이 주르륵 흘러서 놀리시곤 한다.

최근에 엄마가 자전거를 배운다고 하셨는데 나는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그런데 평생 소원이라고 하시고 이 책에서 나오는 나팔수선화 구근처럼 엄마를 꽁꽁 집안에만 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은 조심해서 배우시라고 하긴 했지만 자전거를 타러 나가시면 돌아오실 때까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까봐 너무 두려웠다. 그런데 자전거를 배우신 어머니는 활기가 넘치셨다. 하루가 멀다하고 넘어져서 다리에 멍이 들어도 재밌다고 매일 같이 자전거를 타러 가셨다. 이제는 넘어지지도 않고, 자전거 베테랑인 아빠 속도에 맞추어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실 정도로 실력이 느셨다. 너무 춥거나 눈이 와서 자전거를 못 타는 날이면 시무룩해 하신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새로운 취미로 삶의 활력을 찾고, 소중한 내 환자들과 죽음에 대해 성숙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려면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의 뿌리를 찾아야 했다. 이 뿌리 깊은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이 두려움의 원천은 모든 걸 통제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 것이다. 난 모든 것을 내가 정해놓은 안전틀 안에 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말이지 한치 앞도 모르는 세상이라 방금 전까지도 숨을 쉬던 환자분이 한 시간 뒤에는 이 세상에 없기도 하고, 별이라도 따 줄 것 같던 연인이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하고, 험한 세상에서 이 사람만은 믿어도 된다 했던 친구가 내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하더라.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그저 개구리밥마냥 묵묵히 그 파도에 몸을 내맡겨야 한단 걸 알게 됐다. 난 그저 개구리밥이다, 큰 물결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물결을 예측할 수도 없고 다른 개구리밥이 맞을 물결을 내가 대신 맞아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나 혼자서 이 파도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는 위안, 내 미약한 존재를 알아주는 다른 개구리밥이 있다는 위안, 보잘 것 없는 내 존재가 또 다른 개구리밥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위안으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 이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부디 나중에 언젠가 환자들이 내게 죽음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 때에는 보다 성숙한 개구리밥이 되어 함께 넉넉히 흔들릴 수 있길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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